문법책이 기가 막혀
2019년, 영국의 가수 겸 작곡가 샘 스미스는 폭탄선언을 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전 세계 수십억 인구의 언어 상식을 완전히 뒤흔드는 선언이었다.
“I’ve decided I am changing my pronouns to THEY/THEM.”
“저를 가리키는 대명사를 ‘그들’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샘 스미스가 트위터(지금은 X)에 올린 이 글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남자는 ‘he’
여자는 ‘she’
남자나 여자가 여럿일 때는 ‘they’.
영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진리다.
인간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진리를 뒤엎는 선언이니, 샘 스미스가 앞으로는 거꾸로 서서 두 팔로 걸어 다니겠다고 선언을 하기라도 한 듯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샘 스미스의 공개 선언은 자신이 남자, 혹은 여자가 아닌 ‘제3의 성별’임을 인정해달라는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
올해의 단어, they
같은 해, 미국의 유명 사전출판사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는 ‘올해의 단어’로 ‘they’를 꼽았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수도 없이 사용하는 ‘they’라는 단어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될 만큼 주목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흔히 ‘그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they’에 ‘성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단 한 명의 인간을 가리키는 단수 대명사’라는 정의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물론, ‘they’가 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된 역사는 제법 길다. 단수 ‘they’의 역사는 무려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1375년에 발표된 중세 로맨스 소설 <윌리엄과 늑대 인간(William and the Werewolf)>에서 ‘they’가 단수로 사용됐다고 밝혔다. 이후,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제인 오스틴에 이르는 여러 유명 작가 역시 여럿이 아닌 한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they’를 사용했다.
단수 ‘they’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2019년에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며 새삼스럽게 주목 받았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은 사람, 여자나 남자라는 성별로 규정되기를 원치 않은 사람들. 전통적인 남녀의 개념으로는 성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은 제3의 정체성(non-binary)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they’를 선택했다. 샘 스미스 외에도 영국 배우 엠마 다시, 미국의 배우 겸 가수 데미 로바토,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연기한 배우 에마 코린 등이 ‘he’나 ‘she’가 아닌 ‘they’를 택했다.
‘he’를 택한 ‘she’
실제로 북미 사람들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상당히 인정하는 편이다. 북미의 공항, 관공서, 학교 같은 공공시설에는 대개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외에 제3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비롯한 모든 성별의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추가로 준비돼 있다.
샘 스미스가 ‘he’ 대신 ‘they’를 선택하고, 메리엄 웹스터가 ‘they’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2019년. 바로 그해에 나 역시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던지는 첫 질문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팔자에도 없는 늦깎이 유학 생활 중, 젊은 교수가 수업에 들어온 새내기들을 하나씩 붙들고 물었다.
“이름이 뭐죠? 내가 어떤 대명사로 불러주면 좋겠어요?”
교수의 질문을 듣고 난 도대체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하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름이야 출석표에 적힌 대로 부르면 그만이고, 남자는 he, 여자는 she 아닌가?’
사실 “어떤 대명사로 불러줄까요?”라는 질문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질문을 듣자마자 내 귀를 의심하며 ‘긴장한 탓에 내가 잘못 들은 건가?’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어떻게 불러주면 좋을지, 진심 어린 태도로 답했다. 대개 생김새와 걸맞은 대명사를 골랐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여리고 여성스러운 인상을 주는 금발의 여학생이,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저를 마이클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저를 부를 때는 ‘he’라는 대명사를 사용해주세요.”
킥킥거리며 놀림감으로 삼거나 비웃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명은 따로 있었지만, 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 학생은 줄곧 마이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이클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he’를 택한 학생이었다. 그런 마이클을 ‘그녀’라고도, ‘그’라고도 부를 수 없어, 나는 이 글에서 ‘그 학생’이라고 표현하는 쪽을 택했다.
실제로 ‘they’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메리엄 웹스터는 “영어에는 성 중립적인 단수 대명사가 부족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어 역시 마찬가지다. 타고난 성별을 거부한 사람을 제대로 가리킬 적절한 대명사를 찾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본명을 밝힐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마이클의 본명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불러 본 적도 없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마이클의 본명이 뭐였는지 어렴풋한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대명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하는 건 바로 그 대명사 안에 정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굳이 성별을 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택하는 중립의 대명사, ‘they’가 좀 더 널리 사용되는 지금이라면, 마이클이 ‘he’를 택할지 ‘they’를 택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글쓴이: 김현정 코너 소개: 번역가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언어, 그 너머의 문화와 사람 이야기.
작가 소개: 현직 번역가. <경제 저격수의 고백> 등 50여 권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꿈은 김 작가. 이제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기기보다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k4n8 iamwriting72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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