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연은 작년, 첫눈이 내리던 날 시작되었다. 졸업 논문 실험에 참여했던 그는 결과가 궁금하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 무렵 나는 논문을 다시 써야 할 만큼 피드백을 받았고, 수정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입술만 물어뜯으며 불안 속에서 제자리를 맴돌았는데 신기하게 결과물을 기다린다는 문장 한 줄이 나를 일으켰다. 졸업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에게 논문을 보냈고,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연락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어요.” 까만 뿔테 안경 너머 약간은 수줍은 표정과 반짝이는 눈망울이 보였다. 올해 초 대학을 졸업했다는 그는 200페이지가 한참 넘는 논문을 다 읽고 질문이 생겨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 했다. 두꺼운 논문을 꼼꼼히 읽어준 것도 고마운데, 대화까지 원한다니, 좋음과 미묘함이 교차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해도 되냐며 말을 이어갔다.
그의 군 복무지는 알코올 중독자 재활시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겉으로는 무너져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니 사실 무너진 존재가 아니었다. 저마다 삶을 버티다 넘기 어려운 순간 앞에서 잠시 멈춘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힘겨워 보이는 사람들 안에도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문턱을 넘어서는 작은 도움을 받았다면, 눈앞의 이들이 어떤 삶을 이어갔을까 아쉬움도 들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그를 사로잡았다. 도서관에 가서 책과 논문을 뒤지며 답을 찾아 헤맸고, 지금은 타인을 돕는 방법을 정리한 내용을 검증해 보고 싶다며,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 문과 출신이라 코딩을 전혀 모르지만, 독학으로 만든 코드를 붙여 화면을 구현하는 순간이 즐겁고 설렌다고 했다. 목소리엔 단단한 힘이 녹아 있었고,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 진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취업 하길 원해요. 졸업한 지 반년 정도 지났는데, 사실 면접에 가 본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곳에선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취업이 늦어지는 것보다, 미래에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을 보며 후회할 순간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무모해 보여도, 스스로 기한을 정해 도전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던 이유도 덧붙였다. 행동으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봤지만, 그것을 글쓰기 실험 연구로 증명해 낸 것이 신기했고, 내가 연구를 어떻게 준비하고 고민하며 나아갔는지 직접 듣고 싶다 말했다
그의 휴대폰 화면에는 질문이 빼곡했다. 관심사를 연구로 확장한 과정, 내가 한 연구가 어떻게 변화를 만드는지, 또 자신의 도전을 위해 대학원에 가야 하는지 아니면 현장에서 더 배워야 하는지.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고민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스물일곱, 그의 표정 너머로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취직을 못하면 큰일 난다’는 무게에 눌려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을 자주 접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못한 일을 당차게 시도하는 그가 부러웠다. 동시에, 지금의 나도 겹쳐졌다. 원하는 일을 한다 말할 수 있지만, 그의 눈빛 같은 열정이 지금도 남았는지 스스로 물었다. 한동안 잊고 지낸 마음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나의 이야기도 풀어냈다. 직장을 다니다 대학원에 들어간 결심을 한 순간, 막연한 믿음을 연구로 풀어낸 과정, 수없이 부딪히고 보완하며 논문으로 엮어낸 순간까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고, 질문과 대답이 오가며 각자의 순간을 나누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동안 여운이 남을 것 같다. 그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시도들이 그의 삶 속에 오래 남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취업은 ‘당연한 길’처럼 보이지만, 그를 보며 ‘당연히’라는 단어를 빼야겠다고 다짐했다.
취업이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왜 그것을 유일한 답이라 믿어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