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 나쁜 말, 이상한 말
육아와 자아 사이_노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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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춥겠다.”
신생아를 키우는 양육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그래서 듣기 불편한 말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들었다. 인터넷 카페나 단체 카톡방에 올라오는 경험담을 보면, 특히 연세가 좀 있으신 할머니들이 그렇게 한 마디씩 던지고 가신다고 했다. 한겨울에 태어난 우리 유자는 늦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그래서인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었다. 설령 듣더라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웃으며 듣고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을 보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그 시절에 맞는 게 지금은 맞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 유하고 싹싹하게 받아넘기자 생각하는 편이다. 그랬다.
#1 아들이 원래 좀 둔해
유자의 문화센터 수업이 있는 목요일. 같이 수업을 듣고 나온 아기 엄마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출산 후 백일이 됐을 즈음, 쳇바퀴 같은 육아가 너무 답답해서 유자와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유자의 첫 친구이자 생일이 하루 차이인 여자 아기이다. 이제 곧 이유식 시작을 앞두고 있어서 걱정이 많은 두 엄마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 할머니 두 분이 앉으셨다. 아니나 다를까, 아기들을 보시더니 너무 예뻐하시며 눈을 못 떼셨다.
“이쪽은 아들이고, 저쪽은 딸이구나? 아이고 예뻐라.”
뒤이어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아들 하나야? 딸이 좋아. 딸 낳게 하나 더 낳아.”
종종 듣던 말이라 나는 서글서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유, 둘째 낳으면 딸이라는 보장이 있나요? 또 아들이면요?”
“안돼, 아들 둘은 좀 곤란해. 근데, 딸이라고 믿고 낳는 거야 원래.”
어차피 답도 없고 끝도 없을 이야기이니 허허 웃으며 마무리하고 우리 둘의 대화로 돌아왔다. 유자는 낮잠 시간이 다가와서 졸린지 축 늘어져서 나에게 안겨있었고, 잠도 자고 밥도 먹은 유자의 친구는 혼자서 신나게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다. 어느덧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까 그 할머니가 나를 향해 불쑥 위로하듯 말씀하셨다.
“아들이 원래 좀 둔해.”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씀...? 이유를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밖으로 나왔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얌전히 품에만 안겨 있던 유자를 보고 하신 말씀 같았다. 활발하고 야무지게 장난감을 손에 쥐고 노는 여자 친구와 비교해서 ‘둔해’ 보였나 보다. 하, 평소 얘를 보셨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곱씹을수록 여러모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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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여튼 요즘 것들은
그날 저녁. 한여름의 해가 조금씩 누그러져 가는 오후 6시.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짝꿍과 함께 셋이 가볍게 산책하러 나갔다. 아파트 바로 옆 개울을 따라 나 있는 작은 산책로였다. 집에서 입고 있던 민소매 보디슈트 차림에 선캡을 쓰고 나간 아기는 신기한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여기저기 살피느라 분주했다. 낯선 공간, 새로운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보이는 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정말 사랑스러워서, 하루에 꼭 한 번은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렇게 날마다 철마다 변화하는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땀으로 축축해진 뒷머리는 여름의 감촉이려니 하며 그 불편감에도 익숙해지면 좋겠다.
개울을 따라 핀 금계국을 구경하는데, 마주 보고 걸어오던 할머니 세 분이 갑자기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니, 애기를 이렇게 다 벗겨서 데리고 나오면 어떡한대!”
“아이고 세상에, 아기를, 쯧쯧”
“애기 추워!”
아, 엄마들이 말하던 게 이런 거였구나. 아, 네, 하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가던 길을 갔다. 그때, 한심하다는 듯한 할머니의 마지막 핀잔이 내 등 뒤로 날아와 사정없이 꽂혔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애를 낳아 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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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가야 덥지
산책을 마치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는데도 분한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애가 땀을 줄줄 흘리고 있구먼! 내가 매일 육아 정보를 얼마나 많이 찾아보고 공부하는데!! 그리고 나 딱히 그렇게 막 젊은 요즘 것도 아닌데!!!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새우깡 세 봉지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같이 타셨다. 그러고는 유자를 보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아가, 날이 참 덥지?“
그 한마디에 꽁해있던 내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기 한 5개월? 6개월 됐어요? 아주 똘망똘망하네!“
손녀 셋이랑 같이 살아서 아기들을 딱 보면 대충 가늠이 된다고 하셨다.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기들이 참 힘들겠어요. 안 그래도 어른보다 체온도 높은데.“
”네, 그러니까요!“
격하게 끄덕이며 할머니 말씀에 동의하다 보니 우리 층에 도착했다. 할머니와 새우깡을 기다리고 있을 세 자매를 상상하며 인사를 나누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말, 말, 말
나의 육아 생활은 이제 겨우 6개월 남짓 되었다. 먹고 자고 싸는 일밖에 모르던 꼬물이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나를 향해 기어 오고, 기저귀 갈기 싫다고 짜증을 낼 수 있기까지 급속도의 성장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시작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유자가 커가면서 다가올 육아의 장면 장면에서 듣기 좋은 대사도, 기분 나쁜 대사도,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대사도 무수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애정어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전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아무 의도나 의미 없는 말을 툭 던지기도 할 것이다. 듣고 싶은 말도, 듣기 싫은 말도, 내가 원하지 않을 때도, 예상치 못할 때도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육아 정보도 마찬가지이다. ‘카더라’가 넘쳐나고, 이이는 이러라고 하던데 저이는 저러라고 하더라 부류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말, 말, 말. 끝이 없다.
결국은 육아 당사자인 나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있다. 별 의미 없는 말들에 휘둘리지 않고, 진심 어린 말들은 한 번 더 곱씹어보면서, 필요한 것들은 취하고, 불필요하게 감정 소모를 하지 않고 싶다. 근거 없고 의미 없는 이야기라면 화가 나도 한 귀로 듣고 넘길 줄도 알아야겠고, 들을 때는 기분이 나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에는 마음을 열 줄도 알고 싶다. 우유부단한데 고집은 세고 극 F 성향인 나에게는 평소도 힘든 일인데, 아기와 연관되니 자꾸만 쉽게 날이 선다. 줏대가 있되 유연한데 강인하고 의연하면서도 유하고 싶은데, 참 어렵다. 그래 어렵겠지. 사람 하나 키우는 일이 쉬울 수가 없지. 엄마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지.
웃긴 이야기지만, 한동안 개울가로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할머니들을 또 만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쪽으로 유자와 아침 산책을 나갔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날이 좀 선선해졌지만, 아기는 여전히 민소매 보디슈트를 입고 있었다. 살짝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동안 네 사람을 마주쳤고, 아무도 우리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제는 다 시들어서 까만 줄기만 남은 금계국 대신 노란 달맞이꽃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달맞이꽃이 지고 나면 그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겁내지 말고,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려워하지 말고, 매일 더 부지런히 나가야겠다. 금방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고, 봄을 지나, 또 여름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저 계속 꽃을 보고 싶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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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아와 자아 사이 일 중심의 삶에 임신-출산-육아의 세계가 찾아오면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 글쓴이 - 노현정 (noh.hyounjung@gmail.com) 교육 x 국제개발협력 언저리에서 일하고 여행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다정한 우리를 꿈꾸며 글을 씁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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