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삶을 사랑하기
내가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이미 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집은 작았고, 아빠는 물 한 잔 제 손으로 뜰 줄 모르는 이였다.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안방에서 담배를 피우며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엄마는 세 아이를 돌보는 틈틈이 아버지의 물을 떠다 바쳐야 했다. 언니와 오빠는 자주 다투었고, 엄마는 자주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내게 늘 말하곤 했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생명이 있는 것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없어도 이미 시끄럽고, 화가 나 있고, 복잡한 집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내 생명을 죽이는 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었으나 죽은 것처럼 지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유일하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다. 그러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히려 가만히 있어서,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나를 맞추었다. 여럿이 있어서 의견을 구할 때는 ‘나는 다 좋아요’라고 말하고 모두가 원하는 쪽으로 따랐다. 언제는 배가 아픈데 상대가 햄버거를 먹자고 해서, 먹고 나서 바로 화장실로 갔던 적도 있다.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나는 언제나 어려웠다. 그것은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고 오히려 죄악인 것 같았다. 때때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이 버거웠다.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편했을 것을, 괜히 태어나서 서로 마음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나는 상대에게 나를 맞추느라 너무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그들에게 나를 다 좋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그렇게 되지 못하면 자책을 하고 힘들어했다. 결국 직장을 그만 두었고, 막연히 좋아하고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에세이며 소설 클라스를 다니며 이런저런 글쓰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웹소설을 쓰게 되었고, 나의 소설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껏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나’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었다. 소설을 쓸 때는 누군가를 대면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특정한 대상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 속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꺼내놓을 수 있었다. 스스로 내 존재를 죽여야 했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던 내가, 나 자신을 긍정하며 다른 이들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치유 효과를 주었다. 나는 정말 몰입해서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재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출간을 한 글은, 나오자마자 평가를 받는다. 처음에는 글 쓰는 재미에 평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함께 작업을 하는 동료들을 만나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 평가에 민감해지게 되었다. 누구는 얼마를 벌었다더라, 누구는 첫작인데도 이만큼이나 잘 되었다더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러지 못하는 나는 부족하고 무가치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내가 환경에 나를 맞추었던 것처럼, 글 역시 다른 많은 이들이 좋아할 글에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나는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익숙한 두려움이 나를 에워쌌고, 나는 결국 그 생각에 굴복하고 말았다.
어느새 글에서 내 목소리는 사라졌다. 나는 ‘출간 후에 잘 될 것 같은 이야기’ ‘많은 독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를 썼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작품들을 연구했다. 자극적인 코드를 넣기 위해서 막장 드라마를 엄청 보기도 했었다. 앞부분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끌어들이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갓 출간된 작품들을 앞부분만 연이어 본 적도 있었다. 그때 나를 지배했던 물음은 ‘대체 인기가 많아지려면 어떻게 써야 하는 거야’였다. 내가 웹소설을 쓰면서 느꼈던 재미는 무엇이었는지, 웹소설 작가로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했던 방법들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웹소설 작가로서 인기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오히려 글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다며 웹소설의 기본적인 작법조차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다. 문제는 나의 노력이 아니었다. 나의 목적이었다. 내가 왜 웹소설 작가가 되었고, 내 삶에서 웹소설 작가로 사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돈 잘 버는 웹소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던 것이었다.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왜 웹소설 작가가 되었는지를 회고해 보니 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웹소설 작가로서 벌어들이는 돈보다 내가 웹소설 작가로 사는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을. 돈을 버는 것은 찰나지만 작가의 삶은 평생이다. 글을 쓰는 과정, 그리고 그 글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과정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삶은 오래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래 웹소설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웹소설 작가로 사는 그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떤 웹소설을 써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누군가는 돈을 위해서 쓰는 삶을 사랑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의 선택이다. 그 선택의 주도권을 다른 것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더는 엄마는 내게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는다. 결혼을 해서 독립을 했으므로 나는 예전처럼 가만히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고, 모든 영역에서 내 목소리를 지워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나를 더욱 아프고 슬프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다. 얼마 전에는 대학교 동창을 만났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아픈 부분을 꺼내놓게 되었다. 나만큼이나 힘들었던 친구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이야기를 웹소설에 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라던 직업을 가져서도 행복해지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의 그림자를 다 지우지 못해서인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누군가는 공감하지 않을까. 아니, 공감이 없어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글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런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행복하지 않을까.
*글쓴이 - 김지영
한때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그만 두고, 아이를 키우면서 웹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때로 인기 있는 글들을 보며 질투도 하지만 그래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재미를 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늘 습작생의 기분으로 살아갑니다.
* https://allculture.stibee.com 에서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뉴스레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콘텐츠를 즐겁게 보시고,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