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심판에는 주로 고위 관료들이 나온다. 공직 사회에서 주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이다. 위계서열이 분명한 공직 사회에서, 누군가는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또 누군가는 그 지시를 이행해야만 한다. 작가의 다음 진술은 헌재나 국회에서 보이는 고위공무원의 모습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듯 하다.
고위공무원은 정책을 직접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은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지금까지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증인은 모두 14명이지만, 개인에 대한 공격은 일부에게만 집중되었다. 지시를 따르지 않았거나, 과정 자체를 폭로하는 사람에게 ‘조직’이 내리는 벌이 아닐까.
사회 초년생 때, 업무상 민원, 내부 감사, 소송이 빈번한 부서에 배치되었다. 선배들이 가르쳐 준 팁이 생각난다. “업무 일지에 무조건 적어. 그래야 네가 산다.”
작가의 말처럼, 세상은 공무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키는 대로 했다’ 는 말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지시를 완전 거부할 수는 없지만, 내가 했거나, 해야 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을수록, 더 자세하고 세밀하게 기록을 남겨야 한다. 문제 발생 시 상급자가 애매한 단어를 사용해 발뺌할 경우에 대비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최근 논란의 중심인 체포명단 메모도 공직사회의 이런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항명할 수 없다면,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게 된다. 지시를 충실히 따르지 않거나, 자리를 피하거나.
수습 사무관으로 문체부에 임용된 작가는 출판과에 배치되었다. 그는 동료에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를 추천하며 “올해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군 입대 후, 그는 아찔한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소년이 온다>는 지원 사업 배제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으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시점에 그는 스스로 질문한다.
“만약 내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블랙리스트에 따라 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요령 있게 상황을 회피한 공무원들도 많았다. 일부러 한직으로 발령받거나, 휴직 등을 적절히 활용해 해당 보직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제 막 부서 배치를 받은 신입 사무관은 그런 요령을 부리기 어렵다.
그의 다음 고백은 ‘부당한 지시’ 앞에서 고민하는 공직자에게 울림을 준다.
“내가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입대 시기에 따른 행운 덕분이었다.”
나 역시 몸을 사리기 위해 휴직을 활용한 적이 있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집행된 후, 경호처 안에서도 소극적인 저항의 사례가 나타났다. 일부는 연차를 사용하거나 자리를 비우는 방식으로 항명했고, 취재진 등 외부 세력에 도움을 청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누가 이런 사실을 유출했는지 색출하는 작업이 뒤따랐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