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독일의 겨울 처음 독일로 왔을 때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겨울에는 날씨가 우울해서 계절성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어. 비타민D 잘 챙겨 먹어”라는 말이었다. 꼭 독일이 아니더라도 나보다 먼저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자리를 잡은 주변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이 말을 했다. 처음 들었을 때 날씨로 인해 우울해진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아주 단순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고, 종종 저녁 운동을 하고, 집에 가서는 뻗어서 잔다. 주말에는 카페나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이런 내게 사계절은 옷을 갈아입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을 뿐, 날씨가 감정에 영향을 준다는 건 와닿지 않았다. 심지어는 날씨가 어떻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가해서 좋겠다는 푸념도 종종 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폭염이든, 폭설이든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는 일상인데 날씨가 어떻든 나랑 상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집도 회사도 지하철역에서 10분도 채 안 떨어져 있었기에 바깥 세상과는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았다. 나의 모든 세상은 실내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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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독일에 온 건 8월이었는데, 그 해의 날씨는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습도 하나 없는 뽀송한 공기에 뜨거운 햇살, 파란 하늘을 보며 얼마나 감탄을 했던지. 매일 똑같은 길을 산책해도 그저 행복했다. 독일의 여름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따뜻하고 청량한 천국같은 날씨였고, 벌써 5년차인 지금도 화창한 여름날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하고 있다. 별 거 없이도 쉽게 행복해질 있는 여름에는 오히려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따사로운 날씨를 즐기며 게을러졌다. 모든 희노애락이 실내에 있었던 한국에서의 삶과 달리 독일에서는 수시로 날씨를 확인하게 됐고 좋은 날씨는 그 자체로 이벤트가 되었다.
그렇게 첫 겨울을 맞이했을 때, 사실 우울함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처음으로 어학원을 등록했고 친구들을 사귀었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갔고 친구들을 불러 홈파티를 했다. 낯선 것을 배우느라 바쁘고 지쳤고, 처음 하는 요리에 몰두하느라 매일이 새롭고 정신이 없었다. 문득 누군가가 “독일 겨울을 잘 버티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직 겨울이 특별히 힘든 건 모르겠다고 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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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름도 화창했고, 그 해 겨울은 여행과 사업, 마찬가지로 새로운 친구들과 홈파티를 하는데 바빴다. 이제 독일어도 익숙해지고 점점 더 성장하고 변해가는 스스로가 내심 흡족했고, 겨울은 또 지나갔다. 세 번째 여름은 날씨가 어땠는지도 모를만큼 사업 스트레스로 힘들었고, 잘 마무리한 후 겨울에는 한국을 방문하느라 정신없이 한 해가 갔다. 3년 이라는 시간은 계절성 우울증이 무엇인지 감각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물론 신혼생활의 달달함과 유쾌함이 행복을 더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작년 11월 즈음, 해가 너무 뜨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일상에서 더이상 새로운 게 없고, 반복적인 루틴으로 살다보니 날씨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름 내내 게으르게 누리던 날씨의 행복이 사라진 게 꽤나 큰 박탈감으로 느껴졌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어둑하고 흐릿한 날이 이어졌고, 어쩐지 오전이라는 시간대가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았다. 늘 어딘가 어두운 날씨를 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날씨가 정말 흐리지 않아?”라고 자주 묻곤 했는데 그 때마다 “늘 똑같은 독일의 겨울이지 뭐”라는 답을 들었다. 이제서야, 남들이 느끼는 우울함이 내게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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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성 우울증은 단순히 흐린 날씨를 보며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잠에서 덜 깬 듯 축 처져 있고, 무언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요일 감각도 없이 기운없이 보내는 시간이 반복되고 자도자도 피곤했다. 도저히 집에서는 업무를 할 수가 없어서 노트북을 들고 주변 카페로 향했다. 추적거리는 비와 뼛속까지 스미는 시린 추위를 뚫고 카페의 노란 조명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라도 눈에 보여야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젖은 빨래처럼 축축 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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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개월은 본격적인 겨울과의 싸움이었다. 서울처럼 반짝거리는 쇼핑몰과 수많은 예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내가 사는 도시는 여건이 아쉬웠다. 각종 팝업과 이벤트가 열리는 서울과 달리 본의 백화점은 사시사철 거의 같은 브랜드를 정적으로 진열해두어 오히려 무료하게 느껴졌다. 카페는 저녁 6시면 문을 닫는 곳이 많았고,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집에서 맵고 자극적인 한국 음식을 매일 요리하는 것이었다. 아구찜과 짬뽕을 먹고, 닭볶음탕과 제육볶음, 떡볶이와 두루치기, 어묵탕과 호떡, 오징어볶음, 수육, 돼지국밥 같은 군침도는 음식들을 매일 했다. 그야말로 부부요리단이 되어 매일 장보고, 요리하고, 맛보고 감탄하며, 설거지를 하면 그 날의 이벤트가 끝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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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고 자극적인 음식, 비싼 식재료 값과 요리하는 노동을 생각하면 영 건강하지 않고 비효율적일 지도 모른다. 다른 식료품에 비해 한식 재료들은 너무 비싸서 집밥만 해먹었는데도 한국에서 배달 음식만 시켜먹었던만큼의 식비가 나왔다. 텅빈 잔고에 한숨도 나왔지만, 무기력을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해치운 셈이라 다독였다. 그러다보니 겨울의 고비가 지나 해가 슬슬 길어졌다. 여전히 흐리고 춥지만 전보다 맑은 날이 많아지고, 봄이 올거란 희망이 생긴다. 다시 보통의 간단한 식단으로 돌아가도 그다지 우울하지 않아졌다. 겨울을 잘 보낸 것이다.
계절성 우울증이란 말은 어쩐지 무기력하게 들리기도 한다. 계절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돌아오는 겨울마다 우울해진다면 그보다 더 무력할 수 있을까. 사실 독일에 있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한국의 날씨”도 곰곰히 따져보면 늘 완벽한 건 아니다. 살인적인 추위와 폭설을 견디기도 하고, 미세먼지까지 더하면 애초에 야외 활동은 꿈도 못 꿀 때도 있다. 여름은 너무 덥고 습해졌고, 봄가을은 짧아졌다. 장마철에는 한참을 폭우가 쏟아진다. 그럼에도 한국의 사계절은 적어도 날씨 때문에 우울하다는 말은 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은 계절을 극복할 만한 수많은 실내의 이벤트가 많다. 적당한 가격으로 필라테스, 요가 같은 실내 운동을 하고, 대형 쇼핑몰이 많고,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들이 많다. 외식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좋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도 좋다. 자극적이고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의 종류가 다양해 기분 전환을 손쉽게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오랜 친구와 가족이 있다. 사실 정말로 다른 것은 날씨 그 자체가 아니라, 안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기분전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얼마나 다양한가라는 점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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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해가 거의 안 뜨는 겨울을 보낸다면 비타민D만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지, 그 가짓수를 여러 개 꼽아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즉각적로는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거나 쇼핑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실내 전시를 보러가는 것도 좋다. 독일에서는 겨울에 어느 전시를 가도 사람들로 가득한 걸로 봐서 다들 이렇게 겨울을 버티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력이 된다면 따뜻한 도시로 여행을 가는 것도 더없이 좋다. 좀 더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좋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거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거의 실패없이 나의 우울감을 줄여줬다.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이 편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인데, 힘들어도 집으로 초대해서 요리를 하고, 별 거 아닌 걸로 호들갑 떨며 깔깔 웃을 일을 만들어야 한다. 일부러라도 더 만나고, 일부러라도 더 이벤트를 만들다보면 어느새 겨울이 지나간다.
반짝이는 것이 거의 없는, 해가 뜨지 않는 독일의 겨울은 다른 계절만큼의 평범한 노력으로는 쉽게 무기력해진다. 내키지 않더라도 일단 수업을 등록하고, 약속을 잡고, 유튜브로 입맛을 돋굴 음식들을 찾아보며 레시피를 찾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올 겨울을 보내고 있다. 문득 길거리에서 사먹을 수 있는 한국의 호떡을 떠올리며 “손쉽게 기분 좋아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고 내일의 요리를 준비한다. 금방 또 봄이 오겠지. 유독 더 부지런하고 바빴던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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