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새로운 여행 공식
육아와 자아 사이_노현정 |
|
|
결혼 10주년이 되었다. 서로 의지하고 응원하고 지지고 볶고 인내하면서, 여전히 둘이지만 하나가 되어 사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습해 온 시간이었다. 왠지 10주년은 4주년이나 7주년 같은 여느 해보다 상징적 의미가 더 큰 것만 같아서 뭔가 특별하게 기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어렴풋한 계획은 몇 년 전부터 세워두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거였다. 우리는 패션, 자동차, 명품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고 평소 꼭 필요한 지출만 하는 편인데, 유독 여행 소비에 있어서는 관대한 편이다. 그래봤자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이 편한 사람들이어서 그간 그리 큰돈 들이지 않고 다양한 여행을 해 왔다. 그래서 10주년에도 우리는 떠날 계획이었다. 대신 평소보다는 조금만 더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 동안 여전히 곁을 지켜주고 있는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니 말이다. 동남아의 고급스러운 휴양지에 가서 제2의 신혼여행 느낌을 내거나, 아니면 평소와 달리 멋지게 차려입고 낭만적인 어느 유럽 도시를 함께 거닐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결혼기념일 전날, 우리는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2015년 여름, 당시 유행하던 메르스라는 감염병을 피해 우리는 제주도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했다. 그런 곳에서 10주년 기념 여행이라니, 완벽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생후 5개월이 된 아기가 우리의 여행 팀원으로 새롭게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혼자 잘 앉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그리고 그 부모에게) 아무래도 장거리 이동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엄마는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고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타협점이 제주도였다. 10년 만의 추억여행이자 아기와의 첫 여행은 설레기도 했지만 두려움도 못지않게 컸다. 우리보다 주변에서 더 걱정이 많았다. 아기를 봐줄 테니 둘만 갔다 오라, 아니면 우리가 함께 가서 아기를 봐주겠다, 솔깃한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내고 싶었다. 설령 너무 힘들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더라도 셋이 함께 가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자기 암시를 하고 또 하면서 짐을 쌌다. |
|
|
아직 이르지만 햇볕은 이미 뜨겁게 무르익은 여름, 3박 4일간의 제주도 여행은 우리가 이전까지 해온 여행과 많이 달랐다. 둘일 때의 우리는 울창한 숲속에 자그마한 텐트를 치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비박을 하고, 며칠 못 씻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캠핑카에서 눈을 뜨던 사람들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킹사이즈 침대 두 개가 놓여있는 큰 방에 거실이 별도로 딸린, 꽤 넓고 비싼 숙소를 이용했다. 혼자서 일찍 잠드는 아기와, 늦게까지 놀고 싶은 우리 부부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산에서 트레킹을 즐기고 바닷속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보던 우리는 투명한 제주 바다에 딱 한 번, 겨우 십분 남짓 발을 담그고 나왔다. 널리고 널린 오름은 달리는 차 안에서 표지판으로 구경한 게 다였다. 아직 선크림도 바르지 못하는 아기에게 햇볕은 너무 뜨거웠고, 7월 초의 바닷물은 아직 차가웠기 때문이다. 도시를 여행할 때는 그림이나 사진 전시를 종종 즐기는데, 이번에는 미술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조용하게 집중하는 다른 관람객들에게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서 그랬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이 있다면 전혀 없다시피 한 쇼핑 시간, 그리고 혼자서 바쁘게 앞서가는 내 발걸음 정도였다. |
|
|
당연히 내가 꿈꾸던 10주년 여행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호텔 식당에서 예쁘게 차려입고 여유롭게 코스 요리를 즐기는 커플을 보니 부러웠고, 괜히 가보지 못할 전시회 정보를 검색해 보며 아쉬워했다. 요즘 제주에서 소위 힙하다는 맛집 정보가 SNS에 뜰 때면, 아직 모유 수유를 하고 낮잠을 하루 서너 번 자는 아기와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어서 지도에 저장해두었던 카페가 노키즈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씁쓸해졌다. 아기의 수유 시간과 낮잠 시간을 계속 계산하면서 다음 일정을 계획할 때마다, 둘이서 가볍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즐기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제 본 젊은 부부가 함께 여행 온 부모님께 아기를 잠시 맡긴 듯 단둘이 아침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3대가 같이 왔다면 결혼기념일에 걸맞게 둘만의 시간을 좀 즐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낯선 곳으로 떠나왔으니 이런저런 생각과 대화로 감상에 빠져서 평소보다 늦게 잠들곤 했는데, 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느 날처럼 새벽 6시면 눈을 떠서 엄마 아빠를 찾았다. |
|
|
결혼하고 10년, 연애하던 7년, 총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쌓아 온 여행 공식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 어떤 여행보다 숙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고, 많은 곳을 가보지 못했던 3박 4일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지쳐 잠든 아빠와 아들 옆에 앉아서 지난 며칠간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 셋의 첫 여행이 더할 나위 없었다는 행복감과 성취감으로 벅차올랐다. 승무원의 기내 안전 수칙 브리핑을 신기한 듯 똘망똘망 쳐다보던 눈빛, 공항 게이트 앞에서 만난 다른 아기들을 호기심 가득하게 쳐다보던 눈빛이 사랑스러웠다. 생애 첫 모래사장과 바닷물을 그 작은 두 발로 어떻게 감각했을지 궁금했고, 유아차에 앉아 반쯤 졸면서 바라본 노을은 어떤 빛깔로 마음에 담았을지 궁금했다. 커다란 두 눈이 시원해지게 푸르렀던 차창 밖의 풍경, 말랑말랑한 두 볼을 비비며 느끼는 침대 시트의 감촉, 작고 귀여운 코끝을 스치는 여름 밤바다의 공기, 아침에 창문을 활짝 열면 들려오던 새들의 지저귐을 함께 누릴 수 있어 감사했다. 수많은 처음을 소개할 수 있어 설렜고, 한 번 뿐인 첫 순간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 황홀했다. |
|
|
이번 여행에서 뭘 많이 하지 않은 듯해도 이 작은 사람 안에서는 수많은 감각이 열렸을 것이다. 뭘 바쁘게 하지 않아도 셋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득 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을 이 큰 사람들은 배웠다. 무엇보다 우리의 새 팀원이 꽤 무던하고 협조적이며 유쾌하고 용감하기까지 한 여행메이트라는 사실을 확인해서 더없이 기뻤다. 분명 둘일 때에 비해서 포기하고 체념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셋인 우리가 되면서 채워진 것들이 훨씬 크고 소중해서인지 별로 아쉽지 않았다. 나에게 10년 만의 제주도는 둘이 하나가 되었던 시간에서 셋이 하나가 된 시간으로 새롭게 기억될 것이다. 우리 아기에게는 과연 어떤 기억으로 새겨졌을지 무척 궁금하다. 다채롭고 기분 좋은 처음의 순간들로 기억되면 좋겠다. 그 시작점에 나란히 서있던 우리 세 사람,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처음을 함께 하고 응원할 우리 부부를 떠올려주면 좋겠다. 다가올 10년간 셋이서 새롭게 써 내려갈 여행 공식이 무척 기대된다.
그래서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좋을까나. |
|
|
* 육아와 자아 사이
일 중심의 삶에 임신-출산-육아의 세계가 찾아오면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교육 x 국제개발협력 언저리에서 일하고 여행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다정한 우리를 꿈꾸며 글을 씁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