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일책방지기로 참여하신 분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 마음은 다시 확인되었다. 아침에 망가져버린 입간판 때문에 조심스럽게 "오늘 입간판 상태가 좋지 않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입간판을 세우지 못하고 벽에 기대놓은 내게 “괜찮다”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 집이 시민공원 근처인데, 남편과 함께 전포동까지 산책을 자주 와요. 올 때마다 항상, 오늘은 어떤 문장이 쓰여있을까 기대하며 이 골목을 찾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입간판에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직접 쓰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네요.”
내가 상상 속에서만 그려보던 사람이, 실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문장 하나에 마음을 기대며 이 골목을 찾는 사람.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었던 것이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입간판에 쓰인 문장을 보기 위해 일부러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지금의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누군가에게 문장을 보내는 사람들. 문장에 이끌려 무심코 2층 서점 계단을 오르게 되는 사람들. 그 모든 작은 움직임이, 입간판에 쓰여진 문장이 갖고있는 힘에 이끌려 벌어지고 있었다.
작가가 고심해 한 글자 한 글자 써준 문장은 입간판에 닿는 순간, 하나의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작가의 손을 떠난 문장은, 반드시 필요한 독자에게 향해간다. 그렇게 위로하고, 다정하게 건네고, 때로는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으며 사람들 곁에 남는다. 골목의 어둠을 지나 아침까지, 입간판은 말없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중이다.
최진영 작가의 창작 노트가 수록된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책과 노트와 펜만 있으면 나는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사람에게는 절반만 의지하고 책과 글에 절반을 의탁하면서, 의젓하고 담대한 존재를 꿈꾸며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 여기 노트와 펜이 있다. 오늘을 쓸 수 있다. 하루를 살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쓴 글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겠지만, 이제 다시 걸어보자고 말을 걸진 않겠지만, 늘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일어나도록 만들 것이다. 거듭 넘어질 나를 위해 매일 글을 쓴다.”
이 문장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입간판의 문장을 보고 마음속 밑줄을 긋고, 누군가는 노트에 옮겨 적고, 또 누군가는 그 문장이 꼭 필요할 누군가에게 조용히 공유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늘을 읽으며, 하루를 견디고 있다.
입간판 하나에 오갈 수 있는 마음이 이토록 크고 깊은 것이라면, 일 년에 한두 개쯤 새로 사는 데 드는 비용쯤은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개까지는 괜찮다. 세 개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