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살아있다
무모한 도전, 첫 책
번역가가 된 지 어느덧 20년이 됐다. 나의 첫 역서는 2005년에 출판된 <경제 저격수의 고백(Confessions of an Economic Hit Man)>이다. 내가 번듯한 책으로 인쇄돼 진짜로 서점에서 팔리는 책을 번역하게 된 건 오직 무모한 배짱 때문이었다. 나는 대체로 용감하게 도전하는 사람과는 정반대에 가까운 소심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다짜고짜 유명 출판사 목록을 정리해 막무가내로 이메일을 보냈다. ‘안 되면 말고!’라는 치기와 ‘밑져야 본전!’이라는 도전정신이 웬일인지 차올랐던 것 같다. 그때는.
얼렁뚱땅 메일을 보내놓고 목이 빠지도록 회신을 기다렸다. 안전하고 심심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을 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겁 없이 덤볐던 순간의 패기 덕에 지금까지 책을 번역하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의 경로를 결정하는 건 거대한 운명이 아닌 아주 사소한 결정인지도 모르겠다.
꽤나 다정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못 본 척 무시해버려도 그만이었을 텐데 출판사 담당자들은 잇따라 정중한 거절 답장을 보내왔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투고 메일에 응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거절 템플릿’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인 것이리라 짐작했다.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어도 유명 출판사 편집자들과 메일을 주고받다니 출판계의 문턱을 살짝이라도 넘은 듯 마음이 설렜다.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던 곳이 민음사였다. 실망이랄 것도 없었다. ‘민음사 정도면 이런 이메일은 무시하는 게 당연하지!’라며 쉽게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메일이 한 통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민음사 출판그룹에 소속된 황금가지의 편집자였다. 마침 경제와 관련된 책이 한 권 있다며 나의 번역 제안에 관심을 보였다.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번역가라는 사실이 내심 콤플렉스 비슷하게 내 마음을 짓누르던 참이었는데, 경영학을 전공한 덕에 편집자의 눈에 들었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게 맞긴 하다.
신이 나서 귀에 걸린 입꼬리가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편집자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신사동에 있는 민음사 건물을 찾아갔다. 계약서에 적어넣는 이름 석 자에는 많은 약속이 담겨 있다. 그 무게를 생각하면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고 모든 조건을 세심하게 따져야 한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면, 주인공이 매의 눈으로 계약서를 살핀 다음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을 협상하는 장면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 번듯한 서류 가방이나 누군가의 유품인 만년필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꿨던 책을 번역할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공짜로 번역을 해달래도 이름만 붙여준다면 할 판이었다. 계약서에는 ‘갑’과 ‘을’이 있다. 출판사와 번역가가 사이좋게 나눠 갖는 계약서에서 번역가는 ‘갑’이다. 물론 이름만 ‘갑’일 뿐 처지는 ‘을’이다. 몸값을 낮춰서라도 책 표지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 사람이 수두룩한 번역 시장에서 이름만이라도 ‘갑’을 시켜줘서 항상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본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민음사는 번역가를 상당히 존중해주는 멋진 회사다.)
번역할 원서를 받아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복잡한 도로도, 시끌벅적한 경적도 모두 그대로였지만 나는 신이 났다. 그날부터 내 삶은 더 바빠졌다. 회사에서 종일 번역만 하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책을 붙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낮에는 한국어를 영어로, 밤에는 영어를 한국으로, 방향만 바꿔가며 두 언어를 잰걸음으로 바쁘게 오가는 삶이 시작됐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
<경제 저격수의 고백>은 미국의 감춰진 탐욕을 통쾌하게 폭로하는 책이다. 저자는 ‘경제 저격수’, 즉 민간 기업 직원으로 위장한 채 미국을 위해 비밀공작을 벌이는 일종의 민간 공작원으로 살아온 인물이었다. 경제 저격수로 일하며 저자가 직접 목격한 은밀한 이야기가 책 가득 담겨 있었다. 흥미진진한 책 내용에 민음사의 뛰어난 홍보 역량이 더해져 책은 제법 인기를 끌었다.
첫눈, 첫차, 첫나들이, 첫음절, 첫사랑, 첫인사…. 처음은 언제나 깊이 각인된다. 수없이 반복될 게 틀림없는 일도 ‘첫’이라는 마법의 글자가 더해지면 더욱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을 시작으로 지금껏 수십 권의 책을 번역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단연코 나의 첫 번째 책, <경제 저격수의 고백>이었다. 나의 첫 책은 그렇게 기억 서랍 첫 칸에 고이 자리를 잡았다.
몇 달 전, 영원히 희미한 영광으로 남을 것만 같았던 <경제 저격수의 고백>이 다시 서랍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국의 경제 저격수 노릇을 했던 저자 존 퍼킨스(John Perkins)가 중국에 관한 내용을 추가해 신판을 발표한 것이다. 다시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20년 전에 출판된 한국어 번역판과 새로 출판된 영어 원서를 꼼꼼히 읽어 가며 새 책을 번역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언어는 살아있다. 당연한 말이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달라지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진화한다. 터키가 튀르키예로 바뀐 경우처럼 국명이 아예 달라지는 일도 있고, 사람들의 어법이 달라지는 일도 있다. 지명은 그대로인데 번역만 달라질 때도 있다. 오랜 세월 산호세였던 미국 남부의 어느 도시는 순식간에 새너제이가 되었고, 항구 도시 부산의 영어 표기는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뀌었다. 도시는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있는데 그 도시를 번역하는 방식만 달라졌다.
사람 이름도 달라졌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조셉(Joseph), 알프레드(Alfred) 같은 이름들은 이제 조지프와 앨프리드로 번역해야 옳다. 한때 한국 여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가 지금 방영된다면, 주인공 4인방 중 하나였던 사만다(Samantha)는 서맨사로 불릴 수밖에 없다.
20년 전에 내가 번역한 책 속의 대화를 읽으면서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했다. 연인 관계였던 남녀의 대화는 상당히 성차별적이었다. 대화의 내용이 아닌 말투가 문제였다. 남자는 반말을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존댓말을 하는 기울어진 대화가 영 어색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이었다면, ‘젠더 감수성이 형편없는데.’라며 속으로 번역가를 흉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책의 번역가가 나다. 말이 나온 김에, 이때다 하며 살짝 묻어서 번역가의 변명을 한마디 남겨본다. ‘드라마에서도 남자는 반말하고 여자는 존대하는 구도가 일상적인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뭐 그래도 틀린 건 아니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옳았으나 지금은 틀린 게 되어버린, 그런 말이 얼마나 많을까.
챗 GPT 같은 뛰어난 AI 프로그램이 눈 깜짝할 새 훌륭하게 번역을 해내는 시대에 번역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니! 눈부시게 발전하는 인쇄술을 외면한 채 최고의 필경사가 되겠다고 애쓰는, 시대에 뒤떨어진 느림보 같기도 하다.
책 속에 담긴 수많은 활자를 끌어안고 살아온 지난 세월과 지금껏 읽은 것보다 더 많은 글을 읽으며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다 보니, 반쪽짜리 글쟁이로 살아온 번역가의 언어 생활도 어쩌면 재미있는 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 달라질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라는 파도를 타고 신나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쌓아온 숱한 활자들이 모여 무엇이든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망망대해를 홀로 떠돌기보다는 언어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변에서 함께 서핑을 즐기고 싶다.
[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번역가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언어, 그 너머의 문화와 사람 이야기.
글쓴이: 김현정
현직 번역가. <경제 저격수의 고백> 등 50여 권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꿈은 김 작가. 이제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기기보다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k4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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