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것은?
산을 오르는 아이들 / 윤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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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서라벌 벌판을 가로질러 양산으로 이사 온 지 4개월이 넘어간다. 아직도 개발 중인 이 도시에는 크고 작은 아파트들 사이로 논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겨우 살아남은 땅인 걸까. 먹을 것이 넘쳐나고 쌀도 다 못 팔고 있다는 요즘 시대에, 논이라니! 나는 시골에서 자라지 않아서 논에 대한 기억이 딱히 없다. 그런데도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고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보면, 매일 지어 먹는 밥 때문인 걸까.
나는 아이들의 유년 시절을 늘 자연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이사 온 이곳은 대안학교를 중심으로 스무 가구 정도의 가족들이 마을 공동체를 꾸려 나가고 있다. 마을살이의 거점이 되는 쌀빵이 있는 카페, 과일가게, 책방, 목공소, 텃밭, 배움터, 동아리 등이 있다. 이전에는 마을 논농사도 했었는데, 땅주인이 직접 짓겠다는 바람에 3년 정도 쉬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올해 땅주인이 다시 논을 빌려주겠다는 말에 나는 멋도 모르고 무조건 해보자고 마을 사람들을 부추겼다.
뜻을 함께 할 사람 6명이 모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벼농사 공부를 시작했다. 벼농사 경험이 있는 분이 모임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기꺼이 맡아주었다. 900평 정도의 논이다. 토종 벼를 심고, 무농약, 무비료에 손 모내기까지 할 참이다. 여기 서 있으면, 동해의 일출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는 높다란 천성산이 우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무슨 운명인지, 나는 올해 벼농사를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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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백로가 초록 가득한 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걸 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벼농사 스케줄을 따라 작업을 하다 보니, 그 풍경을 볼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 논에 물길을 만들고, 논을 평탄하게 만들고, 논둑을 보수하고, 볍씨를 고르고, 모판에 일일이 볍씨를 뿌려서 싹을 틔우고, 매일 물을 주며 모를 기르고, 논에 모를 옮겨 심고, 잡초를 솎아 내는 고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쉽게 하려면 이 모든 작업을 기계로 하고 모도 사면 그만이겠지만, 4무(무경운, 무농약, 무비료, 무재초)를 실천하는 자연농법을 한번 배운 이상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레와 풀이 함께 살아가는 논을 꿈꾼다. 언젠가 그런 논을 본 적이 있다. 다른 논의 벼들은 태풍으로 다 쓰러져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땅이 건강한 자연농법으로 지은 농부의 벼는 뿌리가 단단하게 서 있었다.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논에 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생명들로 바글대고 있었다. 자연농법으로 짓는 논에는 미생물을 포함한 수천 종의 생명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서 자란 쌀 한 톨 안에 온갖 생명들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기운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영양가도 단연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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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초록색만 있는 논은 어쩐지 위화감이 든다. 언젠가 논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것은?” 하고 첫째 아이가 물었다. 우리는 미생물! 모래알! 별! 이런 대답을 내놓자, 딸아이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아니야! 사랑이야!” 하고 말했다. 둘째 아이도 옆에서 “맞아, 사랑이 무한대로 많아.” 하고 바로 수긍했다. 아아. 오늘 하루가 정말 좋아지는 순간이다. 오늘처럼만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의 넘실대는 사랑이 우리가 탄 차 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일인지,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늘 우리가 논에 갔을 때, 오리 두 마리를 보았다. 참개구리도 만났다. 아이들은 논물에서 풍년새우와 긴꼬리투구새우를 찾으며 놀았다. 풍년새우는 민물에 사는 아주 작은 새우인데, 오염되지 않은 논에서 관찰된다. 풍년새우가 많이 보이면 벼농사가 잘 된다는 옛말도 있단다. 긴꼬리투구새우도 먹이를 찾아 진흙을 누비고 다닌다. 이름처럼 등에 납작한 투구 모양의 갑각이 있다. 거대한 공룡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인 고생대 화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니, 이 얼마나 오래된 생물이란 말인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토종 벼들, 손으로 짓는 벼농사도 그렇다. 맨발로 햇볕이 데워 놓은 논물에 들어가 한 땀 한 땀 수놓듯 모를 심는다. 혼자 짓기가 어려워 여러 손을 모아 힘을 합쳐지었다. 고된 노동에도 스며들어 있는 넉넉하고 풍요로운 기억의 유전자가 우리 몸에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까마득하게 긴 세월 동안 대를 이어오며 살아남은 이 작은 생명체들을 마주하면서 오래도록 지구를 감싸고 있는 사랑 같은 것이 내 몸속의 세포를 건드는 것만 같다. 그 흐름 속에 우리도 있다고 말이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이 사랑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이 세상엔 사랑이 제일 많다는 그 말이 진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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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아이들]
글쓴이 / 윤경
논과 밭, 산과 바다를 어슬렁거리며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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