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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연구는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따라올 때도, 허점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교수님은 이 문장으로 시작해 피드백을 주곤 했다. 뒤에는 실수나 잘못을 짚는 내용이 따라왔지만 신기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반대로 귀가 꽉 막힌 듯, 상대방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순간이 가끔 찾아왔다. 지친 표정과 한숨이 섞인 채 ‘휴…그래서 말이야…’로 대화가 시작되면 귓가엔 목소리만 맴돌 뿐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너를 위해서’라는 단어가 가끔 들리긴 했지만, 마음속엔 이미 가시 하나가 콕 박혀 계속 찔러 댔다. 불편함이 먼저 자리를 잡은 이유 때문이었을까, 열심히 귀를 기울여도 대화 내용은 자꾸만 튕겨 나갔다.
타인에게 분노의 감정을 보내는 일을 쉽다. 화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건 사실 가장 간편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눌러 담고 타인을 끌어안는 데서 부터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정함', 이것은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덕성이다. 이만큼 어려우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다. 흔히 말하는 '유약함' 과는 가장 반대에 있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모호한 언어뿐 아니라 헛기침이나 하품과 같은 몸짓에도 누군가는 상처받는다. 별 다른 의미가 없었다고 해도 거기에서 감정을 읽어내고 아파하는 이들이 있다.
[김민섭,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일부]
그래서 였을까, 김민섭 작가의 책에 언급된 ‘다정함은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내용에 유난히 공감했다. 다정함은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표정, 목소리, 반응 속도까지 누군가의 선택과 노력이 듬뿍 담긴 종합선물세트처럼 느껴진다. 상대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천천히 고민할수록 주고받는 이 모두가 기쁨을 느끼듯, 섬세한 고민이 먼저 필요한 것 같다.
다정함이 선물이라면, 그것을 건넬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다정하게 대할지, 아니면 무심하게 지나칠지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때로는 마음이 끌리는 사람에게만 주기도 했고, 기분이 가라앉은 날에는 일부러 외면할 때도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다정함 앞에서 제법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다 요즘 Z세대 사이에서 ‘다정근육’을 키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내용을 보았다. 예전에는 다정함이 타고나는 성향이나 성격처럼 여겨졌다면, 이제는 체력처럼 훈련과 반복을 통해 키워야 하는 ‘능력’으로 인식된다는 내용이 반가웠다. 혐오가 만연해진 시대라고 하지만 다정함도 동시에 자라는 시대라면 아직 세상은 따뜻한 이들이 더 많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