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더 많은 일인칭 시선이 필요하다
사유와 자유의 시간 - 강동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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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간판을 고쳐 쓴 뒤 책방 문을 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은 또 어떤 손님이 찾아오실까." 한 번쯤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부산 출장길에 잠시 들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책방지기로 살아갈 때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에서 두 눈 마주 보며 만나는 일이다. 물론 책방지기라고 해서 모든 책의 저자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도 크레타에 다녀갔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책이 서가에 없다는 이유로 조용히 실망하고 돌아간 분도 있었을 테다. 그래서 늘 그런 마음의 여백을 남기고 책방 문을 연다.
작년, 유난히 강하게 각인된 책이 있었다. 《1인칭 가난》.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저자가 '가난'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언어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안온'이라는 필명과는 정반대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성공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시대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벌었는지만이 평가 기준이 되는 세상. 그런데 '가난'을 꺼내놓는 책이라니. 그것도 아주 담담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책방 입구 쪽, 눈에 잘 띄는 자리에 꾸준히 놓아두었고 "책 추천해주세요"라는 말이 들릴 때면 종종 이 책을 꺼내어 소개했다. 추천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이 책이라면 안심이었다. 세상의 무심함 속에서도 누군가는 이렇게, 제 삶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꼭 전해졌으면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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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일인칭 가난》을 쓴 안온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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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김사인 시인의 북토크가 있는 날이었다. 두 시간쯤 남은 시각, 나는 유인물과 출석부를 정리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점 안에는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그 틈을 비집고 한 손님이 조용히 들어오셨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다시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고 손님은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계산대로 다가온 그녀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물었다. "혹시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이 책은 왜 고르셨나요?" 그런데 돌아온 답이 조금 특별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1인칭 가난》을 쓴 안온이라고 합니다." 짧지만 선명하게, 잊을 수 없는 인사였다.
자신의 책을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해놓아 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고, 나는 소중한 책을 집필해주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애써 크레타를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도 잊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아 긴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녀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정보는 들었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크레타에서 북토크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주 맑은 목소리로 "네, 좋아요"라고 대답해주었다. 때로는 이런 우연한 만남이 특별한 자리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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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당일, 크레타의 공간은 30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찼다. 의자에 하나씩 앉은 사람들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고,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조용히 공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어린 시절 정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떤 결정을 할 때면 그 시절의 기억이 저를 지배합니다. 작가님은 나이가 많지 않으신데,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가난은 저에게 가슴 깊이 묻어둔 단어예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정말 깊이 파묻어두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아프고 슬프고 힘들었지만… 그걸 이렇게 끌어올려줘서 고맙다고 느꼈어요.“
가난이라는 말은 단지 경제적 형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앞에서 꺼내기 어려운 마음의 질감이었다. 북토크는 점점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허물며, ‘나도 그랬어요’라는 고백이 이어지는 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말 못 할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왔다는 걸, 그리고 그 무게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의해 조심스럽게 드러나고, 때로는 나눌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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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어는 가난이 아니라, 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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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가난을 말하면서도, 그 단어에 묻어 있는 수많은 편견과 낙인을 걷어내고자 애썼다. 그는 말했다. "감사했지만, 무한히 감사할 수는 없었어요." 멸균우유, 종량제 봉투, 문화누리카드, 수능교재. 제도라는 이름의 '선물'은 누군가에게는 혜택일 수 있지만, 그 혜택에 적당히 순응해야만 했던 사람에게는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또 하나의 증표였다. 그는 그것을 "비를 맞는 일"에 비유했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우산이 없는 것, 그저 받아들이는 일. 이해보다 먼저 생존이 필요한 삶.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썼다고 고백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지 않도록, 스스로도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아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과거를 복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자 했다. 자조적인 글이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글.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썼고, 누군가에게 닿기 위한 언어를 고민하며 글을 써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말한다. "연기를 멈추기로 했어요."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 말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자신보다 어린 세대가, 자신처럼 '세상 쿨한 척'하지 않아도 되길 바란다는 그의 진심. "내가 연기하면, 나보다 어린 애들이 또 연기해야 하니까요.“
작가는 가난이 단지 ‘가족의 불행’이나 ‘개인의 성향’으로 환원되는 것을 경계하며, 가난의 원인을 사회 구조 속에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경력 단절, 저임금 노동, 불완전한 복지 제도 등 다양한 층위의 원인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겪은 가난을 기록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특히 제도권 밖의 목소리, 말할 자격조차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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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만남은, 가난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수많은 마음의 질감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안온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과, 그 이야기에 공감하며 터져 나온 독자들의 진솔한 목소리들. 그 모든 순간이 이 책방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의 삶을 언어로 들여다보고, 그 사람이 품고 온 시간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 그것은 책방이라는 공간이 줄 수 있는 가장 깊고 단단한 감동이다.
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구든 자기 삶을 일인칭 시선으로 말할 수 있는 사회.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꺼내놓을 수 있는 공간. 그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서로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그래서 더는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오기를. 안온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우리가 그 시작을 함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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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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