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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부산역에서 서울행 첫차를 기다리는 열아홉 여고생이 있다. 바로 나의 엄마다. 70년대, 음대 입시를 준비하던 엄마는 2시간 레슨을 받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 왕복 12시간 기차를 탔다. 지금의 나로선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일정이지만, 엄마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 해, 엄마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미래를 그리며 청춘을 채워 나갔다.
사진 속 이십대의 엄마는,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자신감에 찬 표정의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유학도 꿈꿨다는데, 관객의 박수 갈채를 받는 엄마를 상상할 때면, 내가 더 설렜다. 하지만, 결혼 이후 엄마의 무대는 집이 되어 버렸다. 언니와 나, 동생을 낳은 엄마는 음악을 멈춰야 했다.
엄마는 드레스 대신 앞치마를 입고, 마이크 대신 칼과 국자를 쥐었다. 아빠의 출퇴근과 우리를 챙기느라, 엄마의 노랫소리는 거실에서 울려 퍼졌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가끔 궁금했다. 엄마가 늘 옆에 있는 것이 좋았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노래하고 싶지 않았을까. 우리를 키우느라 꿈을 포기한게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을 가끔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가족 옆에 있는 순간이 더 행복하니 괜찮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진짜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TV 화면 속 유명한 성악가를 보는 엄마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우리가 엄마 발목을 잡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에서 였을까, 어렸던 나는 ‘커서 엄마가 못해 본 걸 더 많이 하며 꿈을 이뤄 줘야지’라는 다짐을 수시로 했다. 성악가는 되지 못했지만, 내가 학교를 남들보다 오래 다닌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엄마가 진짜 행복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돌아보면, 엄마는 지금까지 늘 음악과 함께 였다. 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부터 엄마는 지역 합창단, 교회 성가대에 소속되어 노래를 했고, 일년에 한 두 번씩 공연도 했다. 때로는 가르치는 사람도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음악을 배웠는데, 어린 시절 커다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도레미 건반을 치고 콩나물 같이 생긴 음표를 읽는 방법을 배웠다. 가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엄마의 목소리에 화음을 더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마도, 엄마는 삶이라는 악보 위에 가족이라는 멜로디를 얹어 노래를 불렀나 보다. 육십대 후반인 엄마는 지금도 노래를 한다. 교회 성가대나 작은 모임에서 무대를 준비하는 엄마의 눈빛은 언제나 반짝인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나 보다. 과거의 나는, 화려한 무대에 오르는 것만 꿈을 이루는 것이라 오해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안다. 엄마의 노래가 울려 퍼지던 거실은 엄마의 진짜 무대였고, 우리는 무대 위 가장 행복한 관객이었다. 그리고 그 노래소리는 지금도, 우리 곁에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