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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쓰기는 줌 인(zoom In)과 줌 아웃(Zoom out)을 반복하며 나를 관찰하는 과정이었다. 그때는 코로나 시기였다. 정지우 작가가 개설한 수업은 온라인 줌 공간에서 시작되었고, 모니터 화면에는 서울, 대구, 바다 건너 미국에도 살고 있는 10명의 인원이 모였다.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써야만 했다. '힘들었던 순간'을 써도 괜찮을까? 누가 나를 평가하면 어떡하지?를 떠올리며 솔직함과 안전함 사이를 저울질 했지만, '여행 아닌 가출'의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 것 처럼 '줌 인(Zoom in)’해 세밀하게 바라보고, 모아지는 기억을 단어, 문장으로 하나씩 늘려갔다. 몸은 책상 위에 있었지만 그때의 감정과 표정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한 편의 '글'같은 모양새가 갖춰졌을 즈음에는 뿌듯함과 무엇인가 털어 놓았다는 개운함도 함께 몰려왔다.
글쓰기는 한 번에 휘리릭 쓰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모임에서는 에세이 초고를 놓고 합평을 시작했다. 참석자 모두가 타인이 쓴 글에 대한 소감을 말하면 그 뒤로 작가의 첨삭과 피드백이 이어졌다. 작가는 '거리두기'를 강조했다. 과거의 감정에 매몰되어 한번에 쏟아지는 감정을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니라, 한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시점에서 그 순간을 바라보며 쇼잉(Showing)해야 한다고 말했다. 줌 아웃(Zoom out)의 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시점에서 과거의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삼십대의 내가 "괜찮아"라 말하며 울고 있는 기억속 어린 나를 바라 보았다. 가출을 했던 그 순간은 다니던 직장에서 원치않던 퇴사와 가족의 반대로 연인과 이별을 했던 순간이 공존하고 있었다.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던 그때의 나는 단순히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직을 하지 못한 채 회사를 그만 뒀다는 아쉬움과 부끄러움, 이별 이후 상실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어린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듣고 싶었던 말을 모아 하얀 모니터에 하나 둘 쓰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 기억 속에 남겨진 '미해결 과제'는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에 꽁꽁 숨겨 둔 과거를 인정하고 조금은 펼쳐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글은 아니었지만, 한 편의 수정된 글이 마무리 되자 꽉 막혔던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시원함도 따라왔다.
* 글쓰기의 치유적 효과를 연구한 제임스 페니베이커 박사는 트라우마 또는 불안 경험을 쓰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개인의 정신적 안녕감을 개선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일상적인 경험을 글로 쓰는 것만 아니라,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실 관계를 기록하고 당시 느꼈던 감정을 상세히 적을 때 치유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글을 쓰면서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풀어지며 속이 시원해 지는 느낌인 감정의 정화(Catharsis: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기억을 글로 정리해 보는 과정에서 과거의 아쉬움, 상처를 객관적으로 차분히 생각하게 된다. 더해서 그 당시 느끼지 못했던 좋았던, 감사했던 기억 또한 떠올릴 수 있다.
<참고: 정서적 경험에 관한 글쓰기의 치료적 효과, 표현적 글쓰기_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처음에는 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부끄럽고 부담스러웠지만, 에세이를 두 세편 쓰면서 그 마음이 기우였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나의 가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에세이'라는 통로로 만났다. 학대나 폭력 같은 트라우마적인 글을 꺼낸 뒤 걱정하는 이에게는 "아무렇지 않은데요? 이 글이 세상에 나오면 더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을 것 같아요. 나눠주어서 고마워요”라는 편견없는 따뜻한 피드백이 따라왔다. 때로는 글에 담긴 감정에 너도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는 공감과 자기개방도 따라왔다. 글을 나누고 나면 수치심 대신 안정감이 따라왔다. 나에게 그곳은 점점 안전한 공간이 되어갔다.
안전한 공간에서는 더 솔직해도 괜찮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쉽사리 꺼내지 못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폭포수 처럼 ‘글’로 쏟아냈다. 당시 나는 아빠가 암에 걸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빠와의 추억을 공유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화면 속의 이들 중 몇명은 이미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누군가는 화면 속이라 포옹을 해 줄 수 없지만 꼭 안아주고 싶다는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밤 아홉시에 시작한 글쓰기 모임은 새벽 한 두시까지 뜨겁게 무르익었다.
과거의 나와 너를 만나 서로 안아주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나는 그곳이 글쓰기 모임이 아니라 '집단상담'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단상담'은 비슷한 고민이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숨겨둔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치유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과거의 기억을 줌 인(Zoom in), 줌 아웃(Zoom out)하며 말하고, 듣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혼자 쌓아 둔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자신 혼자만 겪지 않는다는 보편성과 수용을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있는 이들이 과거의 나에게 토닥이며 위로를 건네기도, 과거의 나와 화해를 하고 과거에서 한발짝 벗어 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끈끈한 연대감도 느낄 수도 있다.
상담 전공자인 내 눈엔 글쓰기 모임은 분명 치유의 공간이었다. 모임에서는 집단이 집단 구성원들에 심리적으로 의미 있는 특성을 지니는 유의성(Psychological significance)과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된 정체감, 집단 구성원들이 어떤 구분된 전체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만 느끼는 '우리(We-ness)’라는 느낌의 유의한 상호작용(Significant interaction)이 일어났다. 감히 꺼내기 어려운 기억들을 안전한 ‘글’이라는 통로를 활용해 꺼냈고, 과거의 나와 너를 만나 서로 안아주는 시간을 쌓아갔다.
글쓰기 모임을 ‘집단’이라고 표현한 부분엔 마지막 한 가지 이유를 더하고 싶다. 집단상담에는 중심을 잡아주는 전문가 리더가 존재한다. 바로 그 역할을 정지우 작가가 맡고 있었다. 그는 글쓰기만 가르쳐준 사람이 아니었다. 제출했던 글의 첫 문장부터 마지막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담긴 개인의 독특한 개인의 개성과 장점을 알려 주었고, 보완해야 할 부분은 세심하게 짚어 주었다. 한명 한명의 글을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찾아 알려주는 그의 역할은 집단상담의 전문가의 역할과 비슷했다. 숨겨둔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냈을 때 오히려 더 좋았다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쓰고 싶은 이야기는 점점 늘어 갔다. 그렇게 효능감도 얻고 글쓰기 실력도 조금씩 늘어 갔다.
지금으로부터 4년전, 늦은 밤 글쓰기 모임이 지금의 나로 이끌어 준 것 같다. 오늘 밤에도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동안 나는 이미 과거로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해 주는 글은 미래의 언젠가, 오늘의 이 순간 으로 데려다 줄 것 같다.
미래의 내가 오늘의 기억을 다시 꺼내 글을 쓴다면, 오늘의 나에게 등을 토닥이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갔다.
“폭싹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