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라디오를 듣다가, ‘우리의 주권을 되찾은’ 이 구절이 이상하게 마음을 후벼 팠다. 남편과 사과를 깎아먹다가 나도 내 삶의 광복을 맞이한 건 얼마 안 된 것 같다며 장난스레 말했다. “여보가 광복을 맞이하기 위해 한 독립운동이 뭐지?” 남편은 혼잣말처럼 물음을 던지더니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곤 이어서 말했다. “아, 여보에게는 발레가 독립운동이네.”
그 말이 종일 뇌리에 남았다. 듣고 동의하기는 했으나 약간은 부끄럽기도 했다. 내 주권을 찾기 위해 한 게 고작 발레라니? 거창한 독립운동이라기엔 이를 악물고 앙증맞은 어퍼컷을 한 번 날린 기분이었다.
오랜 인연의 시작
십 대 때부터 욕구를 알아차리거나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20대가 되니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모든 색을 투과시키는 사람. 다 괜찮았고,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대학교 시간표 짜기, 봉사활동, 미팅 같은 건 대부분 주변에서 건넨 제안을 따랐다. 그랬던 내가 타의가 아닌 주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발레와 문학 수업이었다.
요즘은 발레가 대중화되었지만 18년 전인 그 때는 아니었다. 2학년 수강신청 때, 교양목록을 훑어보다가 ‘발레’라는 두 글자에 심장이 요동쳤을 뿐이다. 높은 학점을 받기에 유리한지 생각할 겨를 없이 마우스를 쥔 손으로 클릭을 눌렀다. 그 순간이 내 삶을 발레에 매어둘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체대생이 대부분인 수업에서 사범대생은 나 하나였고 퍼포먼스도 단연 뒤처졌다. 하지만 그 땐 그런 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투명인간이었던 내가 가장 선명해진 시간이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그 길로 대학 근처 발레학원을 찾아 나섰다. 과외로 생활비를 벌던 때라 학원비와 의상비까지 감당하기엔 벅찼지만, 어떻게든 돈을 모아 학원비를 내고 레오타드와 슈즈를 샀다. 예전의 나였다면 '내 분수에 무슨 발레야' 하며 포기했을 텐데, 아지랑이 같이 정체 모르게 피어오르는 열망은 그 정도의 장애물은 기꺼이 넘어서게 했다.
이후로 취업준비생이었던 2년을 제외하고 꾸준히 발레를 해왔다. 발레에 코가 꿰인 지 햇수로는 18년, 제대로 시작한 지 11년째다. 스스로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던 시간. 타인이 아닌 오롯이 내게 집중하던 시간. 나로서 숨쉬고 스스로를 책임지던 시간. 발레는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닌 나를 살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발레 항쟁
진짜 투쟁은 결혼 후에 시작되었다. 발레가 단순한 취미가 아닌 내 ‘숨구멍’이라는 점은 일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혼은 일상의 우선순위를 재편하는 일에 다름없다. 내가 하던 일은 업무밀도가 높고 야근과 출장이 잦았다. 그렇다면 취미생활인 발레를 줄여 가정에 쏟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옳은 방향이었을테다. 하지만 발레는 내게 취미가 아니었다. 이 전제에서 모두의 이해를 받을 수 없었다. 가족들은 취미에 이토록 매달리는 나를 납득하지 못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시선은 점차 차가워졌다. 한 친구는 일하고 발레하며 바쁜 나보고 남몰래 투잡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의 신혼은 평범한 일상과 수행 같은 발레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지난한 조율의 시간이자, 발레를 쟁취하기 위한 은밀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남편과의 시간을 대폭 늘리고 발레는 이전에 비해 많이 줄였지만, 야근과 출장, 가정과 발레를 모두 감당하느라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퇴근 후 망원에서 발레하고 밤 11시에 택시타고 신혼집이 있는 과천으로 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전부 내 선택이었기에 그 고단함도 오롯이 짊어지려 애썼다.
나무도 옮겨심기면 몸살을 앓는다고 했던가. 결혼 후 완전히 바뀐 환경에서 사춘기마냥 마음의 어둠이 거세게 찾아왔다. 무기력하게 일상을 영위하던 와중에도 유일하게 놓지 않은 것은 발레였다.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시선에 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굴할 수 없어서 계속 했다.
하루는 내가 참여하는 아마추어 발레 공연을 딱 하루 앞둔 날이었다. 머리로는 내 숨구멍을 이해한다 하면서도, 정작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발레에 불만을 품어온 남편은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발레에 그렇게 매달릴 거냐고. 가정을 위해 나름대로 연습량도 줄이고 틈새 시간을 쪼개며 눈치를 보던 터라, 내 노력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기분에 서러움이 차올랐다. 나 역시 그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터져 버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공연 포스터를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현관문에 붙였다. 내 선택과 열정을 숨기거나 죄책감 가지지 않고, 온전히 응원받고 싶다는 선언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날 현관문에 붙인 포스터는 마치 내 삶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겠노라 선언하며 내건 태극기와 다름없었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발레
발레는 정말이지 나를 살아가게 했다.
엄지발가락, 새끼발가락, 뒤꿈치에 나무뿌리가 있는 것처럼 땅 밑으로 묵직하게 뿌리를 내린다. 동시에 골반과 척추는 하늘로 끌어올린다는 느낌으로 내 몸을 곧추세운다. 동시에 벌어져 있는 갈비뼈는 안으로 조인다. 동시에 허벅지와 고관절은 바깥쪽으로 돌린다. 동시에 쇄골과 양팔은 양옆으로 길게 뽑아내야 한다.
그냥 서 있는 동작 하나에도 내 사지 곳곳의 동시다발적인 에너지를 다르게 사용하며 서 있어야 한다. 내 본래 몸이 안주하려는 방향을 끊임없이 거슬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1초짜리 한 동작 안에서 일어나기에, 고도의 집중력을 나에게 쓰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다.
내 몸에 순도 높은 몰입과 집중력을 쏟으며, 타인을 위해 사느라 흩어졌던 내 삶을 다시 내 중심으로 모은다. 비로소 나로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임신과 출산, 육아의 터널을 지나는동안, 심지어 극심한 번아웃과 마음의 감기를 앓던 그 시기마저 꾸준했던 건 발레였다. 무너지지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루였다.
독립운동이라기에 귀여운 어퍼컷 같아 보여도, 주변의 시선과 포기의 압박 속에서 꿋꿋하게 내 일상에 발레의 자리를 지켜낸 건 분명 나의 적극적인 항쟁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이 작은 항쟁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발레라는 수행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고 빚어가며 얻은 깨달음과 고백을 차근차근 기록해 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