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근사한 취향의 고향을 찾아서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던 작품이 뭐야?" 질문을 듣자마자 승모근에 긴장이 쫙 들어갔다. 대화 상대는 수상할 정도로 콘텐츠에 해박한 친구들이었다. 일명 씨네필, 혹은 미디어 중독자라고 불리는 친구들. 내 주변에는 이런 친구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들은 이 질문에 거장과 고전 명작의 이름을 줄줄댔다. 마치 돌잡이 때 뭐 잡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누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유치원 때부터 50번 넘게 돌려 봤다고 했고, 다른 누구는 <시네마 천국>이 제 취향의 고향이라고 했다. 나는 뭘 말하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그에 준하는 패가 없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영화 한 편 보러 가는 것이 그야말로 연례행사였다. 아마도 비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3명의 자녀까지 도합 7명이 함께 살던 대가족에게는 콧바람 한 번 쐬는 게 유난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본 영화는 구청에서 특별 상영했던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비싼 뮤지컬이나 연극은 말할 것도 없다. 엄마는 독서 습관을 들여 주겠다며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가긴 했다. 그렇지만 나는 대출한 책을 안 읽고 빌려 온 그대로 반납하는, '책 산책시켜 주는 사람'으로 자라났을 뿐이다.
“그러면 너는?” 이제 내가 답할 차례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TV 화면과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족의 모습뿐이었다. 아, 이건 좀 덜 근사한데,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을 내세우는 친구들 앞에서 TV를 보며 자랐다고 말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덜 ‘있어’ 보였다. 뚜렷하게 이거다 싶은 작품이 떠오르지 않자, 화면 조정 시간이 온 것마냥 생각은 삐-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나도 너희랑 비슷하지, 뭐."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드라마였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저녁은 드라마와 함께 흘러갔다. 대가족이 둥근 밥상에 앉아 저녁을 먹은 뒤, 저녁 8시 반이 되면 그때부터 집은 하나의 드라마 왕국이 되었다. 할머니가 즐겨 보시던 35분짜리 일일드라마가 포문을 열었다.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하고 노래하는 KBS 로고송이 나오면 잠시 휴식. 9시 뉴스에 잠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러다 10시가 되면 다시 TV 앞으로 헤쳐 모였다.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내시던 안방에서는 주로 KBS를, 엄마 아빠가 주도권을 쥐던 거실에서는 MBC나 SBS를 틀어놨었다. 나는 보고 싶은 드라마에 따라 방을 옮겨 다녔다. 가장 큰 낭패는 어른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드라마를 보고 싶을 때였다. 가령, 안방에서는 <황금사과>를, 거실에서는 <마이걸>을 볼 때 나는 <궁>을 보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이걸>을 보면서도 마음은 신군과 채경이에게 가 있었다. <마이걸>이 끝나자마자 엄마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11번을 눌렀다. 테디베어가 <궁>의 한 회 스토리를 요약해 주고 있었다. 이미 끝났다는 소리였다.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다. 드라마가 나의 많은 부분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일과 사랑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삼순이를 보며 어떤 순간에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배웠고,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장금이를 보며 나도 선하면서도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모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 말하자면 내 취향의 고향은 이름난 고전이 아닌, 우리 집 저녁을 채우던 수많은 드라마였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일상의 맛
그렇지만 아직 떳떳하게 보지 못하는 드라마도 있다. 대놓고 듣기 민망한 명곡 ‘숨듣명’처럼 숨어서 몰래 봐야만 하는 드라마가 있는 것이다. 드라마 <사내맞선>(2022)도 그중 하나였다. 이 드라마는 평범한 직장인 신하리가 친구 대신 나간 맞선에서 회사 사장 강태무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로맨틱 코미디다. 낯간지럽고 과장된 전개를 흐뭇하게 보던 내게 이상하게도, 평범한 대사 하나가 훅 들어왔다. 왜 식품 회사 연구원이 되었냐는 태무의 질문에 하리는 이렇게 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