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니체는 음악을 공부하여 성당의 미사곡을 써서 연주할 정도로 어린 시절에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체가 5살이 되던 해, 목사였던 아버지께서는 뇌질환으로 사망하였고, 1년 뒤에는 그의 남동생까지 세상을 떠났다. 연이은 비극으로 인해 니체는 신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왜 신은 아버지를 데려갔을까?”
이후, 그의 가장 유명한 명제인 “신은 죽었다”가 탄생한다. 이는 단순한 무신론적 선언이 아니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인간의 삶을 이끌었는데, 근대화가 되면서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세상은 발전했지만, 니체는 여전히 인간이 믿는 가치에 관해서는 이전의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 갇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어떤 것이 옳은가, 혹은 어떤 것이 선한가 등의 문제에 관해서 니체가 살던 시기의 사람들은 여전히 ‘신의 가르침’을 따랐다. 니체의 이 명제는 단순히 ‘신을 버려라’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허황된 믿음을 제거하라는 선언에 가깝다. 그가 볼 때, 기독교의 문제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기득권적 세력이 신을 이용하여 세상의 가치를 가두고 있음에 있었다. 이러한 일종의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 세상을 제대로 보고자 그는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 그렇다면 모든 가치가 다시 원상 복귀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믿고 있던 가치가 모두 허물어지면, 사람들은 우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니체 또한 이를 지적한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태도를 제시한다. 운명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1.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더 잘되게 도와주어야 한다.
2. 운명은 인간의 것이니, 인간은 운명을 사랑한다.
3. 인간은 운명을 더 잘되게 도와주어야 한다.
결국, 신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운명이라도 그것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는 이후의 니체가 제시한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통해 확장된다. 니체는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는 삶이란, “만약 이 삶이 무한이 반복되어도 괜찮겠는가?”라는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 대답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태도에 대한 방법론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란, 인간이 삶을 살면서 매 순간순간에 “이것이 이 순간에 무한히 반복되어도 긍정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한다. 따라서 나는 내 운명이 더 잘되게 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 방법이란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을” 삶을 운명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초인(übermansch)이 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깔끔한 철학적 사유다. 더 이상 신이 규정한 가치를 믿고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인간은, 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방법을 사용할 때 비로소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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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1889년 1월,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었다. 길을 걷다가, 길거리에서 마부가 말을 채찍질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말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말은 호된 채찍질에 울부짖는다. 니체는 그 말을 끌어안고 엉엉 운다. 그는 이후 완전히 정신을 잃고 광기에 사로잡혔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니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 저는 완전히 잘못 살았습니다.”
그는 채찍질을 당하는 말에서 어떤 것을 보았을까? 초인을 말했던 니체가,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임을 선언했던 니체는 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무너졌을까? 나는 그가 어머니에게 했던 “저는 완전히 잘못 살았습니다”라는 말이 너무 아프다. 그는 스스로 ‘잘못 산 삶’을 무한히 겪어야 한다. 그의 영원회귀라는 철학 때문에! 그가 “완전히 잘못 살았다”고 자신의 삶을 또다시 선언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세한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다. 그는 이번 삶이 똑같이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선택의 무게가 무거움을 말했다. 그런 그가 삶을 통째로 부정할 때 느끼는 감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니체는 운명이란 영원히 반복되며, 그렇기에 더욱 인간이 극복하려 노력해야함을 말했다. 그러나 채찍질 당하는 말은 어떻게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채찍질 당하는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인간은 어떻게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말은 ‘채찍질 하는 마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갇혀 울부짖고,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갇혀 울부짖는다. 또한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갇혀 울 수도, 누군가는 ‘병’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갇혀 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결국, 무언가에 대한 억압에서 완전히 해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자신의 철학이 몽땅 다 부정되는 결과에 이른다.
니체는 잘못 산걸까?
나는 니체의 철학에 지금은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말을 붙잡고 울었던 모습에 동의한다. 나는 니체의 삶에서 어떤 아름다운 가치를 본다. 한 인간이 거대한 억압을 극복하는 방법론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려 했던 것,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던 것, 그리고 자신이 잘못 살았음을 고백한 것까지. 니체는 적어도 세상에, 인간에 진실 된 사람이었으며 진심어린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노력했던 개척자다. 그렇지만 그는 초인이 아니었고, 신도 아닌 인간이었기에, 매 순간순간을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살아내는 일을 해낼 수 없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니체의 “어머니, 저는 완전히 잘못 살았습니다”라는 고백을 이렇게 해석하려 한다.
“어머니, 저 또한 인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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