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는 몇 달 전 회사의 조직 개편으로 새로운 부서에 배치된 뒤부터 울적하고 무기력한 날이 많아졌다. 새로운 업무는 낯설어서 실수를 연거푸 했고, 회의에서는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시간이 많았다.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만 겉도는 기분이 들었고, 퇴근한 뒤에는 사람들과 어울릴 힘조차 남지 않아 약속을 피했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D에게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과거에도 느낀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8년 전, 취업 때문에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이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동네가 얼마나 낯설었는지, 새 직장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아 이사를 후회한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신이 왜 힘들었는지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다시 괜찮아졌나요?” D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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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할 만큼 힘들었던 이유는 잘 기억하지만, 회복한 과정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가 무심코 던진 서운한 말, 여러 사람 앞에서 저지른 실수, 동료의 애매한 비난 같은 장면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이미 끝난 일인데도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고 다시 재생된다. 반면 기분이 나아진 순간은 쉽게 지나친다.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가 조금 덜 막막해진 때, 가라앉았던 마음이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은 별다른 흔적 없이 지나간다.
분명 어젯밤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 나는 그럭저럭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연인과 갈등을 겪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관계처럼 느껴졌지만, 화해하고 나면 이 사람보다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인간은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정보에 더 크게 반응하고, 그것을 더 오래 기억하며 더 깊이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부른다. 위험과 손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은 우리를 보호해 왔지만, 그 결과 나쁜 일을 기억하는 데 비해 나아진 순간을 알아차리는 일에는 서툴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 기분이 나빠진 이유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순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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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에는 ‘행동활성화(Behaviral Activation)’라는 접근이 있다. 행동활성화는 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 강력한 심리치료법 중 하나이다.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을 찾아서 반복하는 것이다.
우울할 때 사람은 흔히 관계와 활동에서 물러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사람을 피하고, 사람을 피하면서 더 외로워지며, 움직이지 않을수록 무기력은 깊어진다. 행동활성화는 마음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삶에 즐거움과 의미를 줄 수 있는 행동을 조금씩 다시 시작함으로써 이 악순환을 끊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기분 모니터링’이다.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 전후로 기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기록하여 나의 행동과 감정 사이의 관계를 찾아보는 것이다.
기분을 낫게 하는 것은 반드시 거창한 사건일 필요가 없다. 누군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일 수도 있고, 책을 읽다가 마음에 남는 한 문장을 발견했을 때일 수도 있다. 땀이 날 만큼 몸을 움직였을 때, 귀여운 강아지 영상을 보았을 때, 좋아하는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셨을 때에도 마음은 조금 움직인다.
물론 강아지 영상이나 차 한 잔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 순간 내 마음이 작은 자극에도 아주 조금은 움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기분은 하루에도 여러 번 변한다. 그 변화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특별한 이유 없이 가라앉기도 하고, 갑자기 떠오른 걱정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우울에 깊이 빠진 순간에는 온 세상이 캄캄하게 보인다. 아무것도 나아질 것 같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울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고 생각은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기분이 조금 풀리는 순간에는 시야도 함께 넓어진다. 조금 전까지는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서 다른 출구가 보인다. 잠시 쉬었다 다시 시도할 수도 있고, 도움을 구하거나 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들은 긍정 정서가 사람의 순간적인 사고와 행동의 범위를 넓히고, 장기적으로는 관계와 문제 해결 능력 같은 개인적 자원을 쌓게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좁아졌다가 넓어지는 감정의 순환을 지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순환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꾸라졌던 기분이 무엇 때문에 다시 살아났는지, 나는 어떤 때에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지를 알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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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울적했던 기분이 어떻게 나아졌나는 질문에, 한참 뒤 D가 답했다. “친구에게 도와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D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어느 날 퇴근 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친구는 이야기를 들은 뒤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D는 여행을 준비하며 한동안 멈추었던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요가원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하나둘 생겼고,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다가 조금씩 대화를 하게 되었다.
D가 캄캄한 시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망설임을 뚫고 친구에게 전화를 건 것, 친구가 건넨 손을 잡은 것,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 새로 만난 사람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 것이 모두 그녀가 그 시간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D가 가진 훌륭한 ‘자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산은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재산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원(resource)’을 빌려 표현한 것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다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적·외적 힘을 뜻한다.
미래가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마음, 한 사람과 신뢰를 쌓아 온 시간, 몸을 건강한 방식으로 돌보는 습관, 실패한 뒤에도 다시 시도해 본 경험은 모두 자산이 된다. 친구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두려우면서도 전화를 거는 힘도 자산이고, 무기력한 날에 운동화를 찾아 신고 나가는 행동도 자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힘든 순간에는 그 존재를 잊는다는 점이다. 마음이 좁아지면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시도할 방법도, 과거에 어려움을 이겨 낸 경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평소에 내 마음의 무기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를 살게 했던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던 사람, 마음이 복잡할 때 펼쳐 보았던 책,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켜 온 수면 리듬. 내게 그런 자산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의 무기력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자산이 매번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 하나는 지금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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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긍정심리학에서는 좋은 경험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의식적으로 머물러 느끼는 ‘음미(savoring)’ 전략에 주목한다. 음미는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되새기거나, 현재의 좋은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앞으로 다가올 즐거운 일을 기대하면서 긍정적인 감정의 강도와 지속 시간을 늘리는 과정이다.
행동활성화가 ‘무엇을 했을 때 내 기분이 달라지는가’를 발견하는 일이라면, 음미는 그 나아진 순간을 너무 빨리 흘려보내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회복으로 이어지는 행동을 찾게 하고, 다른 하나는 회복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조금 더 오래 남게 한다.
나를 다시 일으킨 순간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려 보자. 나만의 회복 기술을 하나씩 터득하고, 그것을 잊지 않도록 보관해 두자. 남들이 보기에 사소해도 괜찮다. 나 자신조차 그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원래 사소한 것 때문에 살아난다. 누군가의 짧은 안부, 햇볕이 드는 창가, 따뜻한 음식 한 그릇처럼 작고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다시 온기를 돌게 하기도 한다.
하루가 끝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건네 보면 어떨까. 오늘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괜찮아진 순간은 언제였는지. 그때 나는 누구와 무엇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거창한 대답이 아니어도 괜찮다.
‘점심을 먹고 십 분쯤 걸었더니 답답함이 조금 줄었다.’ ‘친구가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어 주어서 마음이 놓였다.’ ‘하기 싫었지만 샤워를 하고 나니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대답을 하나씩 적어 두자. 그것은 기분 좋은 순간을 수집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내가 어떤 방법으로 삶을 견뎌 왔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언젠가 어두운 날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기록은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너는 전에도 이곳을 지나왔다고. 그리고 지금도 네 마음 어딘가에는 다시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 남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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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Istock
* 글쓴이 - 이지안
여전히 마음공부가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감정 글쓰기>,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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