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는 없다
하찮은 다정함이 사람을 살린다
‘쉬었음 청년’을 아는가? 말 그대로 특별한 활동 없이 쉬고 있는 젊은 층을 뜻하는 표현이다. 취업 준비도, 공부도, 직업 훈련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과 비슷하고,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구직단념자(discouraged worker)와도 닮았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으잉, 그럼 백수 아냐?’ 정의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략 비슷하다. 그렇다면, 누구나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백수’라는 말이 있는데 왜 ‘쉬었음 청년’이라는 낯선 표현을 사용하게 된 걸까?
‘백수’라는 단어가 가진 이상한 힘 때문이다. 백수라는 말은 괜히 사람을 쭈그러들게 만든다. 왠지 게으르고, 의욕 없고,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 같기도 하다. 백수가 원래부터 부정적인 말이었던 건 아니다. 백수(白手)의 본래 뜻은 ‘하얀 손’이다. 섬섬옥수처럼 단아한 이미지, 기다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장면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왜 부정적인 기색이라고는 없는 이 단어에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사람’이라는 비관적인 의미가 덧씌워졌을까?
그 배경으로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노동자와 흰 손의 사나이>가 종종 언급된다. 작품 속 ‘흰 손의 사나이’는 육체노동과 거리가 먼 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한다. 검게 그을린 거친 손과 대비되는 말끔한 흰 손을 노동자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본다. 노동하지 않은 손, 고생의 흔적이 없는 손에 대한 반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놀랍게도 ‘흰 손의 사나이’는 노동자를 위해 혁명에 가담한 인물로 결국 자신이 몸 바쳐 싸웠던 노동자들로부터 감사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그냥 교수대로 끌려간다.)
러시아 문학에 등장한 ‘흰 손의 부르주아’는 국경을 넘고 세월을 건너 ‘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진화했다.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어지고 청년 실업이 늘어나면서 백수라는 단어에는 ‘놀고 먹는 사람’, ‘궤도를 이탈한 사람’ 같은 온갖 부정적인 의미가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쉬었음 청년’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미 낙인이 되어버린 단어를 대체할 좀 더 포용적인 대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수’보다 부드럽게 들렸던 이 말조차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낙인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공백 상태를 강조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좀 더 세심한 표현을 고심하던 고용노동부는 올해 초 새로운 표현을 내놓았다. 바로 ‘숨고르기 청년’이다. 숨을 고른다는 건 단순히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열심히 달리다가 잠깐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에 가깝다. 실패해서 주저앉은 사람이 아니라 다시 뛰기 위해 리듬을 조절하고 마음을 다잡는 상태 같달까? 단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잠깐 쉬어가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숨 가쁜 청년들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져 주는 다정한 토닥임 같다. 최근에는, ‘사회적 로그아웃 청년’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로그아웃’이라는 말속에는 지금은 사회에서 잠깐 로그아웃한 상태지만 언제든 다시 로그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이런 변화 앞에서 “굳이?”라고 되묻는 사람도 많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꾼다고 뭐가 달라집니까?”라고 따지거나,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할 시간에 진짜 일자리나 창출하라고요!”라며 화내는 사람도 있다. “지금 장난해요?! 그럴 거면 그냥 백수라고 불러요. 가만히 잘 있는 청년을 왜 자꾸 건드리는 거예요?”라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맞다. 단어 하나 바꾼다고 실업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장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노력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언어가 진화하는 방향에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더라도 어떤 단어를 고르는가에 따라 비난이 될 수도 있고, 이해와 배려가 될 수도 있다.
백수에서 ‘쉬었음 청년’으로, ‘쉬었음 청년’에서 다시 ‘숨고르기 청년’, 혹은 ‘사회적 로그아웃 청년’으로 변신하는 이 놀라운 언어의 진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혐오와 배척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정한 배려의 마음이 진화의 연료 노릇을 한다.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 멈춰 있는 현 상태를 비난하기보다 새롭게 도약하려는 노력을 인정하는 마음, 노동시장으로 돌아온다면 언제든 환영하겠다는 포용의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여 누군가를 다정하게 부르는 말이 생겨난다. 누군가를 ‘게으른 사람’, ‘실패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듣는 사람한테 예상보다 따뜻한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다정한 언어를 향한 진화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권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유색인종을 비하하는 발언이 사회적인 터부가 된 지는 한참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낙인까지 예방하는 좀 더 섬세한 접근이 눈에 띈다. 불법 체류자를 묘사할 때 말 그대로 ‘불법’이라는 뜻의 ‘illegal’ 대신 ‘서류가 구비되지 않은’이라는 의미의 ‘undocumented’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불법’이라는 단 한 단어만으로 누군가를 순식간에 범죄자로 낙인찍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집이 없는 사람을 묘사할 때도 ‘homeless’ 대신 ‘unhoused’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Homeless’가 개인의 결핍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unhoused’는 집이 없는 상태에 초점을 두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단정짓기보다 그런 상황이 문제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도 어리둥절해한다. “도대체, 멀쩡한 단어를 왜 바꾸는 거야? 다들 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거야?”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물론 완벽한 단어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생긴 표현에 또 다른 낙인이 덧붙어 누군가를 다시 찌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느샌가 낙인이 되어버린 단어가 매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면 그들을 덜 괴롭히는 표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정도는 얼마든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되묻기 전에, 누군가는 그 단어 때문에 오래 상처받아 왔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 떠올려 보는 것. 어쩌면 그런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다정함이 사람을 살리는 걸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꾸는 건 거대한 구호보다 작은 말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다시 세상으로 나올 힘을 주는 말, 누군가를 덜 외롭게 만드는 말, 결국 세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는 말. ‘백수’에서 ‘쉬었음 청년’으로, 다시 ‘숨고르기 청년’으로, 그리고 언젠가 등장할 또 다른 표현으로 계속 이어질 이 느리고 서툰 언어의 진화는 누군지 모를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인간의 다정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다정한 타인들의 그 작은 걸음들이 모이면, 세상은 조금이나마 더 따뜻한 곳이 되지 않을까.
김현정
읽고 쓰는 삶을 좋아하는 번역가입니다. 주로 경제경영 서적을 번역하고, 가끔 제 글도 씁니다. 취미는 책 사들이기입니다. 한강 작가가 어딘가에 적어둔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많은 책장’이라는 글귀를 가장 좋아합니다. 오늘도 책을 향한 저의 짝사랑을 불태우며 당당하게 책을 주문합니다. 이상은 높고 실천은 덜 하는 편이지만, 두루 책이라도 읽어두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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