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젊은 여성이 이런 험한 일을 하게 됐어요?” “두 사업을 다 하는 것이 가능해? 하나에만 집중하는 게 맞지 않겠어?” 내가 내 일에 대해 소개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이야기이다. 사회인이 되어 일을 시작한지 올해로 딱 10년째다. 10년이라는 경력이 무색하게 나는 꽤 오랜 시간 내 직업을 설명하는 일을 어려워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알법한 직무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한 가지 일만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앞선 질문에 대한 설명, 내 일에 대한 정의를 하기 위해서는 두 남자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고, 왜 동시에 두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데 반드시 함께 설명해야 할 주인공들. 두 남자와의 얽히고설킴, 그것은 2015년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바로 시작되었다.
나는 입사 시험도, 직장 상사와의 회식도, 팀장에게 배우는 일의 요령도 모른다. 아르바이트 몇 번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직장인’이라는 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내 사회생활은 첫 번째 남자인 아빠의 공장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업을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당연하게 언젠가 나만의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못해도 무조건 경영학과를 가야 했다. 힘겹게 경영학과에 진학한 뒤 아빠 공장에서 일 한다고 하면 같은 과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좋겠다’고, ‘취준 없이 바로 사업을 하는 셈이니 몇 단계는 앞서가는 거 아니냐’고. 내 친구들이 그랬듯 사람들은 내가 탄탄한 가업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아빠 역시 ‘플라스틱 사출’을 업으로 삼은 지 나보다 고작 몇 해 정도 더 된 선배일 뿐이다. 아빠는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몇 번의 실패 끝에 현금 2백만 원과 차 한대에 살림살이를 전부 싣고 아내와 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일을 시작했다. 오랜 직장 생활 끝에 받은 퇴직금을 걸고 개발한 제품인 금연필터가 소위 성공을 이루고, 그 성공의 나비효과는 ‘외주를 주지 말고, 직접 만들어보자’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 공장이 바로 플라스틱 사출 공장이었다.
살면서 ‘사출’이나 ‘금형’이라는 단어를 들어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금형은 제품의 모양을 찍어내는 붕어빵 틀 같은 것이고, 사출은 뜨겁게 녹인 플라스틱을 그 틀에 넣어 식힌 뒤 제품으로 꺼내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 기계들이 가득한, 열기와 소음이 뒤섞인 공장에서 내가 맡은 첫 번째 업무는 경리였다. 거래처 원장을 맞추고,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 자금일보를 작성하고, 발주나 구매를 하면서 기초적인 회계와 관리업무를 배웠다. 사업을 하면서 돈을 관리하는 회계는 필연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수학엔 영 소질이 없었고, 대학 시절 들은 경영학 수업 중 원가회계관리, ERP 같은 수업에 제일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업이었다.
우리 공장은 본래 플라스틱 사출을 전문으로 하던 회사가 아니라 금연필터 하나를 기반으로 출발한 회사였기 때문에 플라스틱이 많이 활용되는 자동차나 화장품 업계처럼 굵직한 거래처를 보유한 회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영업할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흡연율도 줄고, 전자담배도 막 출시되던 시기여서 공장은 매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단은 회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자란 실력으로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고 블로그, 카페에 회사를 소개하고 각종 모임에 나가 명함을 돌렸다.
하지만 플라스틱 사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영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화가 오면 앳된 목소리로 나는 우물쭈물했고 그 사이 상대방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짜 미팅까지 이어지면 그제야 거래가 이루어졌다. 내가 아닌 아빠가 미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부터 아빠의 미팅하는 자리 옆에 메모지를 들고 앉아 하나하나 받아썼다. 아빠는 온화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상대방을 맞이했다. 자녀 유무나 고향이나 사는 지역을 묻는 등 스몰토크를 나누며 상대가 먼저 본론을 이야기 하도록 기다렸다. 가끔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딪쳐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지 않고 유보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나는 나의 유일한 동료이자 상사인 아빠의 모든 사업 스킬을 몸으로 익혔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공장에서 나만의 입지를 만들어 나갔다. 사장님의 낙하산 딸이 아닌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어엿한 2인자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이 마냥 재밌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족히 스무 살은 더 많은 어른들 사이에서, 매일 화장기 없는 얼굴로 허허벌판에 맥도날드도 스타벅스도 없는 파주 외곽 공장으로 출근해서 한겨울 매서운 추위와 여름의 열기를 견디는 일은 20대 중반의 내가 막연히 그리던 ‘사업’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공장을 겉돌며 또 다른 나만의 일을 찾아 돌아다녔고, 그렇게 두 번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패션 사진을 찍고, 브랜드 마케팅을 하고, 홍대와 이태원을 누비던 그의 세계는 내가 살던 세계와 전혀 달랐다. 해가 맑게 떠 있는 날, 홍대 커피스미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모델들이 찾아온다. 노트북 화면에 가득 뜬 패션 사진 시안들을 보고, 그 날 입은 착장과 개인의 개성을 살릴 포즈와 표정을 의논하는 그의 하루는 내 눈에 너무나 멋져 보였다. 멋진 공간에 초대 받아 브랜드를 소개하는 모습은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었다.
커피라곤 믹스커피 뿐인 공장에서, 눈앞에 보이는 제품의 무게와 모양, 재료의 양 같은 실체가 확실한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세숫대야, 쓰레기통 같이 평범한 생활용품을 대량으로 팔기 위해 애쓰고, 단가 10원, 20원을 두고 싸우던 것과는 사뭇 다른 무엇이 그곳에 존재했다. 그런 그의 삶을, 그를 동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매력에 빠져버린 나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져 사귀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고 나의 삶은 반쪽으로 쪼개졌다. 낮에는 아빠의 공장에서, 밤에는 남자친구의 홍대에서 두 남자의 세계를 오가는 정반대의 이중첩자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뒤 남자친구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를 열어 브랜드 마케팅 대행 일을 시작했다. 그는 감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가 “곧 뜰 것 같다”고 말한 컬러는 그 다음 시즌에 필히 떴다. 조용히 성장하고 있는 브랜드를 눈여겨보다가 “저 브랜드 잘 될 것 같다”고 하면 정말이지 그 브랜드는 잘 되기 시작했다. 브랜드가 무엇이고, 마케팅은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모르던 나는 남자친구 회사의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공장과는 또 다른 영역의 일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낮과 밤은 따로 흘러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때의 나는 각자의 일이 참으로 다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경계가 허물어진 일이 발생했다. 매출이 점점 줄고 있던 금연필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남자친구와 이야기했고, 우리는 이 제품에 리브랜딩을 해보기로 결심 했다. 패키지를 다시 하고 네이밍에 변화를 주고 단순히 금연을 할 수 있는 기능을 넘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젊은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도록 사진 작업과 홍보에 매진했고, 그것이 좋은 발판이 되어 큰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 거래를 계기로 공장은 대표자가 내가 되고 대출을 받아 직접 공장을 짓게 되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내 중심이 되어 공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곧바로 코로나가 발생했고, 경영난이 이어지면서 숱한 위기를 맞았다. 아빠가 밖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나는 안에서 플라스틱 사출 뿐만 아니라 인쇄나 조립, 포장과 납품까지 모두 맡아 진행하는 ‘턴키 제조’를 무기로 공장을 운영했다. 그 이후로도 7-8년의 시간동안 공장과 브랜드를 살리기 위한, 나와 두 남자의 고군분투가 이어졌다. 이런 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장은 계속해서 나빠졌다. 긴 시간 동안 모든 사업이 벽에 부딪혔고, 결론적으로 공장은 경매에 넘어가고, 나는 파산을 해야 했다.
이렇게 단 몇 줄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 시간을 모두 설명하자면 아득할 뿐이다. 오랜 꿈이었던 나만의 사업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된 그 해, 나는 내가 왜 25살에 이런 저런 모험 한번 없이 아빠의 공장을 가는 선택을 했는지, 왜 남자친구에게 다 죽어가는 제품을 살려보자고 해서 이 구렁텅이에 함께 빠지게 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했다. 10년에 걸쳐 소기업 한 곳을 운영하고, 1인기업 브랜딩 에이전시의 이사로 있었다는 것이 내 커리어의 전부였다. 이제 삼십대가 된 내가 이 경력을 가지고 제대로 된 직장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조차 확신이 없었다. 긴 시간 아빠와 남자친구에게 배우고, 의지하는 동안 나는 내가 전면에 서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두가지를 동시에 했기에 결국 둘 다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닐까 후회하기도 했다. 10년을 보낸 결과가 완전한 실패로 느껴졌다.
그렇게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며 나는 내 모든 것들을 확인했다.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어떤 기질적 특성이 있는지, 무슨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온갖 검사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은 스스로 집요하게 묻지 않고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정말 사업을 하고 싶은 것이 맞는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되물었다. 그러다 나는 내가 지나온 것들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보기로 했다.
10년동안 나는 공장에서 제품이 탄생하는 전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다. 금형이 어떻게 제작되고, 사출을 하다 보면 어떤 이유로 불량이 생기고, 후가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제품을 제작하고 납품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지, 공장을 운영해본 사람이라서 다른 공장과 소통을 쉽게 할 수 있었고, 기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 현장의 시간들이 내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같은 시간 동안 남자친구의 에이전시에서 제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펀딩, 촬영, 상세페이지 제작, 블로그 광고 등등의 스킬들을 경험하며 유통과 마케팅을 배웠다. 그의 감도나 아이디어들도 쏙쏙 빼먹어 나만의 관점을 갖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제조공장에서만 일했으면 모를 다양한 분야를 보고 들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브랜드와 협업하거나 소통을 할 때 장점이 되었다.
둘 중 어느 분야의 완전한 전문가도 아니지만 두 분야를 모두 해본 몇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은 이런 나를 씩씩하고 대단하게 봐준 대표님을 만나 다시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단순히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에게 배운 퍼스널 브랜딩으로 나를 홍보하며 제품 제작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컨설팅 일도 하고 남자친구와 함께 직접 제품을 만들어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어쩌다 젊은 여성이 이런 험한 일을 하게 됐어요?” “정말 어쩌다 보니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완전한 제 일입니다.” “두 사업을 다 하는 것이 가능해? 하나에만 집중하는 게 맞지 않겠어?” “두 사업이지만 곧 하나에요. 그리고 둘 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것이 그 질문에 대한 내 답이다. 두 남자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아빠의 일도 아니고, 남자친구의 일도 아니다. 두 남자의 조연으로 시작한 내가 두 세계에서 배운 것으로 ‘나의 일’을 만들었다. 이제 나는 내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공장과 크리에이터 사이의 언어를 통역해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이 되도록 돕는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걸어온 10년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나를 만든 일의 기록이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내 적성이 아니다. 앞으로도 지난 선택들이 내게 남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때로 인생이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해도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와 색깔을 찾으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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