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중에 제일 예쁜 인꽃
육아와 자아 사이_노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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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허락하는 한 아기와 나는 하루 두 번 산책을 나간다. 아침 7시에 한 번, 오후 4시 전후로 한 번. 9개월에 접어들며 활동량이 부쩍 늘어난 우리 유자가 유아차에 앉아 차분히 자연 감상, 사람 구경을 즐기기를 바라며 시작된 일과이지만, 사실 내가 아기의 파닥거림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체력을 충전하고 기분을 환기하기 위한 이유가 더 크다. 산책을 가게 되면서 나도 덤으로 낯선 시간대에 새로운 장면을 하나둘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넓어진 나와 유자의 세상을 거닐다 보면, 문득 이 풍경이 유자의 미래에도 펼쳐졌으면 하는 마음이 피어오를 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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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문동 솔숲
집에서 차로 15분을 달리면 해안선을 따라 자리한 소나무 숲에 다다른다. 멋들어진 소나무 아래에는 길쭉한 보라색 꽃대를 자랑하는 맥문동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다. 보랏빛 물결이 일렁이는 솔숲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기분은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그래서 매년 늦여름, 꽃이 한창일 때면 꼭 한 번은 그곳을 찾는다. 유자의 첫 신선놀음을 위해 그날도 소나무 숲에서 모자의 데이트를 한창 즐기던 중,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아기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아이고, 꽃 중에 가장 예쁜 인(人)꽃이네. 맥문동보다 훨씬 예쁘네.”
나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사람꽃. 참 예쁜 말이다 싶어 마음이 따뜻하고 환해졌다. 비록 요즘 노키즈존을 비롯해 아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시공간을 마주하지만, 그래도 아기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예뻐하고 귀여워하며 미소 짓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난다. 아마 지역 소도시에 살다 보니 더 그런 것도 같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환영받고 사랑받는 아기의 시절이 금방 지나버릴 것 같아 괜히 서운해진다.
무언가 잘하지 않아도, 굳이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그저 지금처럼 존재만으로도 귀하게 여겨지는 유자의 삶이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사람의 아름다움이 더 짙게 풍기는 세상에서, 유자 역시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또 남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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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등굣길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 비슷한 루트로 산책하다 보니 같은 사람들을 자주 마주치는데, 나는 종종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그중에서도 아침마다 함께 등교하는 한 여학생과 남학생이 가장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둘이 나란히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 꼭 청춘영화의 한 장면처럼 건강하고 예뻐 보여서다. 처음에는 남매인가 했는데, 다음날 보니 여자아이가 다른 방향에서 와서 남자아이를 기다리길래 그렇다면 커플인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왜 남녀가 함께 있으니 커플일 거라고 당연하게 짐작하는 걸까, 나도 참 고리타분하네, 생각했다가, 이내 가장 친했던 남자 사람 친구와 매일 함께 등하교하던 나의 중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각자 살기 바빠서 생일날 생사 확인 정도만 주고받지만, 그 시절에는 둘이 여러모로 잘 맞는 친구였다. 역시나 선생님과 친구들은 우리의 관계를 수시로 의심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연애 상담을 해주는 쪽이 더 어울리는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자라면서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논쟁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유자의 성장 과정에도 그런 좋은 여자 사람 친구들이 함께해주면 좋겠다. 유자가 자기와 다른 성별, 나이, 관심사, 장점, 경험 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될 줄 알면 좋겠다. 같고 다름, 옳고 그름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거나 편 가르는 일에 최대한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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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 바닷가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바닷가에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의 하류와 서해가 만나는 곳인데, 바다이긴 하지만 사실은 드넓은 갯벌이어서 푸른 물결도 파도도 없는 황톳빛 바다다. 그래도 나름 아침마다 바닷길을 따라 산책하는 호사를 누린다고 생각하며 지낸다.
갑자기 아침 공기가 매서워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조용한 산책로를 걷다가 저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다들 카모플라쥬 커버를 씌운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여기가 유명한 철새도래지라는 사실 말이다. 아침 산책길은 거의 우리 둘뿐이어서 나는 늘 유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종알대곤 하는데, 오늘은 옳다구나 싶어 철새 이야기를 해줬다. 추워지면 우리 동네로 왔다가, 봄이 오면 더 추운 곳으로 날아가고, 다음 겨울이 되면 또 돌아올 거라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걱정되었다. 내년 겨울에도 저 철새들이 이곳으로 날아올까. 나의 이 설명을 우리 유자가 이해할 즈음에도 과연 우리 집 앞에서 철새들을 볼 수 있을까. 유자는 과연 철새를, 벚꽃을, 매미를, 낙엽을 만날 수 있을까.
유자가 살아갈 세상에는 아름다운 자연이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이미 벌써 늦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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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아와 자아 사이 일 중심의 삶에 임신-출산-육아의 세계가 찾아오면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 글쓴이 - 노현정 (noh.hyounjung@gmail.com) 교육 x 국제개발협력 언저리에서 일하고 여행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다정한 우리를 꿈꾸며 글을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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