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일까, 사랑일까?
뭐라고 부를까, 우리 사이?
썸, 어디에서 왔니?
연애의 첫 단계는 누가 뭐래도 ‘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단번에 사귀는 사이가 될 수는 없다. 알 듯 말 듯,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듯’ 알쏭달쏭 미묘한 관계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알아가는 사이’라거나 ‘호감 있는 사이’라는 말보다 ‘썸’이라는 단 한 글자가 애매모호하고 간질간질한 그 관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썸’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썸.’
분명히 아는 단어 같겠지만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단어가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썸을 들리는 대로 쓰면 ‘some’이다. 복수형의 명사 앞에서 ‘약간의’, ‘얼마간의’ 같은 뜻의 형용사로 사용되거나 유사한 뜻의 대명사나 부사로도 변신 가능한 바로 그 ‘some’ 말이다.
너무 뻔해 보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화이팅’이 ‘fighting’이 아니듯, 우리가 툭하면 사용하는 ‘썸’은 ‘some’이 아니다.
(TMI. ‘화이팅’은 영어의 영어 버전은 다양하다.
‘넌 할 수 있어’라는 의미일 때는 ‘You got this!’, 혹은 ‘You can do it’
힘든 상황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내라고 말할 때는 ‘Stay strong’
시험을 잘 보라고 응원할 때는 ‘Good luck!’
운동 경기 등에서 응원할 때는 ‘Go, go, go!’, 혹은 ‘Let’s go!’
등으로 말할 수 있다.
다만, 이토록 많은 말이 ‘화이팅’으로 해석되지만 ‘fighting’만은 절대 금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진심을 담아 ‘fighting’을 외쳤다가는 응원의 뜻을 전하기는커녕 주먹을 부를 수도 있다.)
‘썸’이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말인지 그 출발점을 찾으려면 약간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된다. 정답은 바로 ‘something’이다. ‘무언가’, ‘어떤 일’같이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단어 ‘something’이 한국으로 건너와 ‘썸’이 된 것이다. (something은 some과 thing이 결합된 단어인 만큼 우리가 이야기하는 '썸'이 'some'과 깊은 관련이 있기는 하다.)
기류가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을 놓고 “Something’s going on between them.”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어로 살펴보는 남의 연애사
미국 사람들도 물론 ‘썸’을 탄다. 다만, 우리는 “우리 사귈래?”라는 말로 관계를 공식화하기 전의 모든 단계를 ‘썸’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리지만, 영어에서는 ‘썸’에도 단계가 있다.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복잡미묘한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을 살펴보자.
Talking stage, 대화로 쌓아가는 설렘
그 첫 번째는 ‘talking stage’, 즉 ‘대화하는 단계’다. 문자나 DM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어로 바꾼다면 ‘탐색 단계’ 정도 될 것 같다. 서로 연락은 하지만 딱히 정해진 규칙이나 의무는 없다. 누구와도 마음껏 대화할 수 있는 예비 연애 단계랄까? DM 하나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감춰진 신호를 한 줄의 문자 안에 꽉꽉 채워 보내는 단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Situationship, 애매모호한 그 어디쯤
1단계를 지나 100%의 확신을 갖고 공식적인 관계, 즉 ‘relationship’으로 직진하는 커플도 있겠지만 인생은 대개 직선이 아니다. ‘talking stage’에서 진지하게 데이트하는 관계, 즉 ‘relationship’으로 가는 길목에는 ‘situationship’이 있다. ‘상황’을 뜻하는 ‘situation’과 ‘관계’를 뜻하는 ‘relationship’을 합친 신조어 ‘situationship’. 한 마디로 ‘애매한 관계’다. 그저 서로 탐색만 하는 ‘썸 타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남자 친구’, ‘여자 친구’로 정의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다. 이따금 데이트를 즐기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관계는 아닌 ‘회색 지대’쯤 되는 관계다.
FWB, 우정과 욕망 사이
미드를 보면 ‘friends with benefits’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혹은 줄여서 ‘fwb’라고도 한다. ‘같이 자는 사이’라는 점에서는 여느 남녀 사이와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감정의 결 자체가 다르다. 보통 ‘썸’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talking stage’, ‘situationship’, ‘seeing each other’ 단계에는 감정적 설렘과 긴장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fwb는 말 그대로 ‘친구 사이’일 뿐이다. 평범한 친구 사이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요소가 더해진 관계일 뿐 두 사람의 관계는 철저히 우정이다.
Seeing each other, 깊어진 썸
서로 조금은 더 진지하게 데이트하는 상태를 뜻한다.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공식 커플은 아니다. 공식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situationship’과 비슷한 면도 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situationship’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래서 불안하고 애매모호한 관계, ‘seeing each other’는 공식 커플이 되기 위해 좀 더 깊이 알아가는 단계에 가깝다.
Relationship, 마침내 사귀는 사이
설레고 불안하고 애매모호한 감정의 파도를 넘어 서로에게 ‘내 남자 친구, 내 여자 친구’라고 명확한 이름표를 붙인 관계가 바로 ‘relationship’이다. 물론 ‘relationship’이라는 게 꼭 연애 관계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political relationship(정치 관계)’, ‘diplomatic relationship(외교 관계)’ 등 세계 무대에 등장할 법한 굵직굵직한 사건에도 ‘relationship’이라는 단어가 얼마든지 붙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굳이 ‘romantic relationship’이라는 부연 설명 없이 ‘relationship’이라는 단어 하나만 써도 얼마든지 ‘연애하는 관계’, 혹은 ‘사귀는 사이’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예를 들어, “남자 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에 “I’m in a relationship.”이라고만 말해도 “나 지금 연애 중”이라는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연애는 과학이 아니다. 모두가 정해진 순서대로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도 아니고, 각 단계의 경계가 명확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마지막 종착점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그래도 ‘something’이 한국으로 건너와 ‘썸’이 되고, 그 ‘썸’에 ‘(분위기를) 타다’라는 술어가 더해져 ‘썸 타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나는 이 놀라운 언어의 매력을 파헤쳐 보는 건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번역가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언어, 그 너머의 문화와 사람 이야기.
글쓴이: 김현정
현직 번역가. <경제 저격수의 고백> 등 50여 권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꿈은 김 작가. 이제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기기보다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브런치 이메일: iamwriting7205@gmail.com
* https://allculture.stibee.com 에서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뉴스레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콘텐츠를 즐겁게 보시고,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Copyright © 해당 글의 저작권은 '세상의 모든 문화' 필자에게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