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울면 아빠는 ‘우는 게 뭔 자랑이냐’고 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딸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이제는 아예 ‘울음 방석’까지 만들었다. 울고 싶으면 거기 앉아서 다 울고 말하라고 한다. 말도 곧잘 하는 애가, 울어도 해결되지 않을 일 앞에서 우는 게 싫기 때문이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방석 위에 몰래 앉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놓인 솜방석이 따뜻해서도 있지만, 울고 싶어서다. 울음 방석에 앉기만 하면 눈물이 쏟아졌으면 좋겠다. 밤마다 샤워를 하는 루틴처럼 매일 십 분씩 운다면 개운할 것 같다. ‘눈물 주치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못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파묘’하는. 바늘로 눈물샘을 콕 찌르면,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거다. 전치 2주, 전치 4주처럼 슬픔의 농도에 따라 흘리는 눈물의 양이 다르다.
농담이 아니다. 슬픔이 쌓이면, ‘응어리’가 되고, 응어리는 병이 된다. 이 우주에는 아직 눈물 주치의가 없기에, 환자인 나는 시를 읽게 된다. 아래는 시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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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시인은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는 게 뭔 자랑이냐'고 배운 내게 이 구절은 가장 절실했던 허락인 듯했다. 슬픔을 억지로 숨기거나, 철봉에 매달리듯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우는 얼굴 앞에서는 뭐가 그리 가혹한지.
아빠는 오늘도 TV 안에서 한 남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뭘 울고 자빠졌냐"고 중얼거리고, 나는 시집을 덮고 조용히, '울음 방석' 위에 앉는다.
나는 그제야 딸에게 건넨 '울음 방석'을 돌아본다. 울음을 긍정하는 공간이 아니라, 울음을 격리하고 단절시키는 감옥으로 사용했던 나를 본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만 울자고 말하지 않는다. 울음은 울 만큼 울었을 때 그치는 것이지, 누군가의 명령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딸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나에게 말하고 싶다. 딸아이에게 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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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 서나연
*코너 제목 - 하루 한시 ㅣ 에세이 쓰다, 시를 배우다
*코너 소개 - 에세이를 쓰다 시를 배우게 된, 엄마이자 작가의 기록. 시 한 편을 중심으로, 일상의 감정과 나름의 결론을 햄버거처럼 차곡차곡 쌓아 전합니다. 가끔은 뜨겁고, 가끔은 물컹한 한입을 함께 나눠요.
*작가 소개 - 문예창작과를 나와 유독 ‘시’감성이 충만한 글러버입니다. 매일 쓰고, 다듬으며 살아갑니다. 공저 에세이집 <전지적 언니 시점> 등을 펴냈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요?” 그 질문이 저를 살게 합니다. 언젠가, 저는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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