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체계는 가능한가?
온전한 빛과 구원의 서사는 가능한가?
체계가 단 하나의 구멍도 없을 수 있을까?
더 쉽게 말하면, 나에게는 모순이 없을까?
모순 없는 삶, 일관적인 삶을 꿈꿀 때에는 서양 형이상학에 빠지곤 했다. 그때 나는 완전한 체계가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내 인생은 온전한 빛과 구원의 서사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불가능함을 증명하는 이론들은 너무나도 많았고, 급기야 나는 내 삶에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붕괴를 마주하며 ‘체계의 완전성’을 불신하게 되었다.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은 체계가 완전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일이야 말로 체계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 알제리 출신 프랑스철학자인 자크데리다(Jacques Derrida)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알제리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화 정책에 부역하여 토착 무슬림들을 핍박했었는데, 데리다의 집안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정착한 유대계 집안이었다. 그래서 어린 데리다는 학교에 가기만 하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적 언행을 감당해야 했다고 한다. 데리다는 태어날 때부터 이방인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국적은 알제리이지만, 언어는 프랑스어를 썼고, 유대인이었다. 데리다는 후에 자신의 모국어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오직 하나의 언어(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나의 것(알제리어)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는 후에 『환대에 대하여』에서 이방인을 어떻게 환대해야하는가에 대해 탐구한다. 그의 철학은 전체적으로 ‘체계의 가능 조건이면서 체계 안으로 포섭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데, 이는 사회·정치 철학적 맥락에서는 타자, 즉 이방인이고, 형이상학적 맥락에서는 차연(différance)이다. 데리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의 타자철학일 것이다. 그는 이방인으로 태어나, 이방인에 대해 연구했다. 그 이방인은 하나의 세계를 온전치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방인은 어떻게 세계에서 긍정될 수 있는가?
데리다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를 중요시 여기며, 동시에 타자가 삶에서 의미를 갖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이 지점은 데리다의 문자학이 그의 타자론과 연결되는 고리가 된다. 기호는 반복을 위해서 출현했다. 언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비슷한 물건을 보아도 같은 단어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객체나 사물, 이름 등이 존재할 수가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보다는 훨씬 순수하긴 하겠지만, 이렇게 반복할 수 없는 것들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즉, 기호 없는 세상은 ‘순수 무의미의 폭력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 무의미·폭력의 세계를 벗어나, 원래의 의미를 아주 약간 퇴색시키며 그것을 ‘기호화’하는, 반복 가능한 의미의 세계를 살고 있다.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반복되어야 하고, 반복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기호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데리다 철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해석할 수 없는 타자인 이방인이 내 삶에 침투했을 때에, 이들을 진정으로 환대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기호화하여, 반복시키는 것이 중요할 테다. 다르게 말하면 이들을 (해석할 수 없어도) 해석하고, (반복할 수 없어도) 어떤 순간에선 다시 소환해야하는 것이다.
타자를 진정으로 맞이하는 방법
그렇다면 그들을 해석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까? 아직 고려해 볼만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우선 즉각적인 행동이나 판단을 멈추고, 그들에 대해 충분히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즉각적인 판단으로 인해 해석의 틀을 ‘나’에게만 고정시켜 버리면 타자는 타자로써 존중받는 것이 아닌 내 안으로 편입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또한 진정한 환대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를 ‘순수 무의미의 폭력’으로 치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를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를 최대한 온전히 알기 위해서, 멈추어 사유해야한다. 이 태도는 이방인이 내 세계를 침투할 때나, 내가 다른 체계에서 이방인으로 대우 받을 때, 나와 이방인이 서로의 세계에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이방인으로 시작해서 의미를 갖게 된다. 데리다의 철학이 내게 처음에는 이방인이었다가, 지금은 ‘체계의 완전성’을 불신해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의미를 창출한 것이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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