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일단 쓰기 시작한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내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여러 감정이 동시에 솟아올라 혼란스러울 때 일단 쓰기 시작한다. 그 답을 알고 있어서 쓰기 시작하는 건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모르겠다’는 말에서 시작해 볼 수 있다. 일단 생각나는 것은 모조리 쏟아놓는다. 순서가 틀려도, 논리가 엉망이어도 상관없다. 내 감정을 뒤흔든 사건, 여태껏 떠올려보았던 생각, 나를 스쳐 지나간 감정을 모두 떠올려본다. 마치 강에 넓은 어망을 던져 놓고 그물에 걸려든 조각들을 하나씩 건져 올리듯, 듬성듬성 흩어진 감정과 생각을 하나씩 써 내려 가본다.
“왜 저 사람 말에는 이다지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나는 이 일이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도대체 내 마음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도 괜찮다. 언뜻 떠오른 상대의 말이나 내 행동이 있다면 그것부터 써도 좋다. 그 모든 것들은 이 질문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의 답이 되어줄 것이다.
하루 종일 몰아치게 일했던 날, 목구멍까지 걸려있던 질문을 쏟아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쉬지 못하고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는 걸까.” 실은 여러 차례 내게 묻고 답을 얻지 못했던 질문이라 이번에도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을 풀어 써 내려간다는 것은 꼭 정답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에 질문하고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긴장되었던 마음이 해소가 되고 나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조금 더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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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 떠오르는 이유
지금의 감정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가끔은 과거 어느 날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관련 없는 기억도 있지만, 어떤 내용은 찬찬히 그 의미를 살펴보면 연결고리가 보인다.
글을 써 내려가다 문득 고3 어느 날 집에 찾아온 교회 목사님이 떠올랐다. 목사님은 무얼 위해 기도해 주면 좋겠냐고 했고, 나는 “원하는 만큼 계속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을 했었다. 그때는 학업을 오래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부모님께 의지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학구적이거나 학교 공부를 재미있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학위를 받거나 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더더욱 없었다. ‘왜 목사님의 물음에 단번에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라는 답이 나왔을까’라고 과거의 나에게 되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말한 공부는 입시나 진학과 관련된 공부라기보다 그 당시의 나에게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무엇이었다. 결과적으로 공부를 하느라 고향을 벗어나 다른 도시, 잠시는 유럽 어느 나라까지 다녀왔고, 궁금했던 심리학, 공동체, 글쓰기 따위를 배우면서 낯선 세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내 시선과 생각이 바뀌어왔다.
“가만, 내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인 거 아닌가”라는 문장이 이어졌다. 낯선 분야의 책을 읽고 흠모하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는 것. 모두 ‘성장하고픈 욕망’과 맞닿아있었다. 과거의 그 사건이 왜 떠올랐는지 그제서야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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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의심하기
여기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더 깊은 자신과 만날 수 있다. 한 번 더 스스로에게 ‘왜’냐고 묻고 또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왜 공부는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 질문에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내가 공부를 통해 얻은 것들이 주르륵 펜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서 무언가에 도전하고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던 게 아닐까.” 익숙한 세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니 무엇이 내 생각을 결정짓고 있었는지 잘 보였던 기억도 떠올랐다.
너무 답이 쉽게 얻어진 것 같다면, 의심해 보아도 좋다. 미디어나 책, 타인의 말에서 들었음 직한 문장이나 단어로 쉽게 결론짓고 있다면, 그 답이 참말로 자신이 동의한 것인지. 자신에게도 진실한지 되물어보는 것이다. ‘모나지 않아야 한다’라거나 ‘돈을 많이 벌어둬야 한다’라거나 ‘열심히 일해야 한다’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제동을 걸어본다. 아무런 의심 없이 지금껏 으레 그렇겠거니 하고 받아들였던 것일수록 집요하게 물음표를 달아본다.
“나는 혹시 ‘성장’이라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스스로에게 딴지를 걸어보기도 했다. 성장이라는 다소 긍정적이고 피상적으로 포장된 단어에 갇혀 내 진짜 욕구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드시 성장해야 하는 것일까’, ‘성장하는 것이 내 삶에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라는 의문에서 ‘‘성장’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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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단어를 고쳐쓰기
너무 익숙하고 뻔해 보이는 단어라면, 오히려 그 단어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라도, 사람마다 거기에 담긴 감정과 기억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실’이라는 단어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목표를 이룬 뒤 찾아오는 뿌듯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살아온 지난날의 억울함과 한스러움을 되새기게 하기도 한다. 자신이 늘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 단어 자체가 자책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말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나에 대해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른다.
“나에게 있어 성장이란 무엇이었을까.” 질문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술을 연마하고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라기보다, 세상을 보다 진실되게 바라보고, 타인의 목소리가 아닌 나만의 기준을 스스로 세워가는 일. 그리고 그 기준의 날을 더욱 예리하게 벼려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성장에 가까웠다.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게 해준 어떤 담론에 희열을 느꼈던 순간들, 통념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보며 나를 억눌러온 규범에 균열이 생기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단어는 ‘자유’였다. 내가 바라는 공부의 끝은 자유에 있었다. 공부를 통해 다양한 시각을 획득하고, 내 생각에 확신을 채우고,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꼈다.
여기서 더 멈추지 않고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 나는 어쩌다 자유를 그렇게 갈구하게 되었는지, 자유를 위한 공부라지만 지금의 여유로움을 빼앗아 갈 만큼 그렇게 중요한지 내게 계속 묻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나로부터 조금씩 더 이해 가능한 나로 다듬어지고 정제되어 간다. 비록 명확한 결론에 닿지 못하고, 내 질문에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 여정 속에서 내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충만함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오늘의 이 작은 발견에 기대어, 나는 내일 혹은 언젠가 다시 ‘왜 나는 이토록 성장에 매달리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또다시 글을 이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노트를 펼치고 감정의 한복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면 좋겠다. 폭풍 치는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들여다봐주자. 일단 두 바늘을 잡고 한 코를 뜨기 시작한다면 실은 조금씩 풀려나올 것이다. 나를 이해하게 만드는 언어로 가득한 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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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지안
여전히 마음공부가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을 출간하였고,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하였습니다.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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