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열린 사고의 소유자 일지도
한동안 짬뽕에 빠져있었다. 기회가 되면 새로운 중국집의 짬뽕을 맛보려 시도했는데, 종종 아니 꽤 자주 애초의 의도를 저버리고 다른 메뉴를 먹곤 했다. 회사 근처에 중국집을 방문할 때면 같이 방문한 이의 추천에 따라 메뉴를 바꿨다. 하루는 누군가가 ‘여기는 우동이 맛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여기는 짬뽕보다는 짜장면이 더 맛있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같이 간 사람의 말에 따라 메뉴를 바꾸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팔랑귀이다.
나의 팔랑귀 일화는 또 있다. 나는 자타공인 뜨죽따, 즉 ‘뜨거워 죽어도 따뜻한 음료’ 였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차를 고집했지만, 내 남편은 얼죽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였다. 한겨울에도 장갑 낀 손으로 아이스를 마시는 그를 보며 혹시 냉혈인간이 아닐지 의심했지만, 놀랍게도 대학원 선후배들까지 전부 얼죽아였다. 인간의 체온이 36.5도라는데,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걸 유지하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겨울에 찬 음료를 마신다고 정말 사람이 얼어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조심스레 짝꿍의 아이스를 한 입 얻어 마셨고,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알게 되며 얼음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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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을 사용하면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나침반이 언제나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이유는 지구가 하나의 큰 자석과도 같기 때문이다. 자석은 같은 극은 밀어내고, 다른 극은 잡아당기는 특성이 있다. 나침반의 바늘은 아주 작은 자석이어서, 큰 지구 자기장에 영향을 받아 정렬된다. 나침반의 N극은 북쪽(North)을 가리키고, S극은 남쪽(South)을 가리킨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지구는 S극이 북극을 향하고, N극이 남극을 향하는 자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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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이 자석에 붙는 원리는 나침반이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는 원리와 비슷하다. 금속 안에는 작은 나침반이 많이 있는데, 이 나침반들은 평소에는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금속 전체로 보면 자성이 없는 듯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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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주변에 자석이 없을 때 금속 내부. 작은 나침반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출처: ScienceORC 학습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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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처에 자석이 나타나면 나침반들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된다. 자석은 같은 극을 밀어내고, 다른 극을 잡아당긴다. 그림3처럼 자석의 S극이 금속 위에 나타나면, 금속 안 작은 나침반들은 N극이 위를 향하고, S극은 아래로 향한다. 작은 나침반들이 정렬되면서 금속은 자석과 같은 상태가 되어 자석에 달라붙는다. 다만 자석과 금속을 떼어놓으면 금속 내부의 나침반은 방향을 잃고, 금속은 다시 자성을 잃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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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주변에 자석이 있을 때 금속 내부. 작은 나침반들이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자성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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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나무나 플라스틱 같은 물질은 자석이 근처에 있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무나 플라스틱에 자성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내부에 나침반이 별로 없기도 하고, 그조차도 고집이 센 나침반들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자석이 있더라도 이 나침반들은 원래의 방향을 고수한다. 그래서 근처에 자석이 있어도 자성이 생기지 않고, 자석에 달라붙지 않는다. 이를테면 금속은 팔랑귀고, 나무나 플라스틱은 뚝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팔랑귀는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을 말한다. 별거 아닌 것에도 쉽게 혹하고, 자기 줏대가 없음을 낮잡아 이른다. 하지만 주변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팔랑귀라는 금속의 특징은 일상 곳곳에 활용된다. 냉장고 문에는 잊지 말아야 할 메모나, 여행지의 추억을 담은 마그넷을 붙여 놓을 수 있다. 냉장고 문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금속이 자기장에 영향을 받는 덕분에 우리 일상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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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필자의 집 냉장고에 붙어있는 마그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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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사람들이 공평하게, 절반은 삼성 스마트폰을, 절반은 애플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보자. 극단적인 고집쟁이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이 균형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원래 쓰던 브랜드를 고수할 테니, 삼성이나 애플 모두 굳이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주변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 나은 스마트폰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생길 수 있고, 두 회사는 그들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제품을 개선하며 경쟁하게 된다.
내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첫 스마트폰은 삼성에서 만든 갤럭시 S1였다. 하지만 이내 주변 친구들의 의견을 따라 아이폰으로 갈아탔다. 그런데 요즘 삼성에서 만드는 폴더블 스마트폰을 보다보니 호기심이 생긴다.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삼성으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자타공인 팔랑귀답다. 그렇지만 이런 팔랑귀를 잡기 위해 기업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폭 넓은 선택지를 누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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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보니, 나의 팔랑귀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 자신이 줏대 없어 보여 탐탁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회사 앞 중국집에서 내가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볼 수 있었고, 시원한 커피를 즐기는 방법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또 삼성의 세계와 애플의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팔랑귀로 살아가는 일은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의견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인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 팔랑귀 덕분에 우리 사회가 다채로워지기도 한다. 팔랑귀라는 이유로 기죽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서 자랑스럽게 여길만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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