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을 갈 때마다 나는 AI에게 많은 것을 묻는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방법부터 혼자 가기 좋은 식당, 메뉴에 적힌 낯선 음식의 이름이나 조리법까지. 때로는 알아볼 수 없는 현지어 간판 사진을 찍어 보내고 읽어달라고 한다.
현지 파트너나 호텔 직원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내 개인 일정에 관한 질문이 그들에게 일거리 하나를 더하는 것 같아 먼저 추천해주지 않는 한 굳이 묻지는 않는다. 업무만으로도 신경 쓸 일이 많은 출장지에서 바로 물어볼 상대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하는 느낌이다. |
|
|
이번 모로코 라바트(Rabat) 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미나 준비를 위한 급한 일들을 쳐내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출장 중에는 보통 한 호텔에 묵으며 조식을 먹고, 세미나장에서 점심과 하루 두 번의 커피 브레이크까지 해결한다. 저녁만큼은 호텔 밖으로 나가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보려 한다. 이런 시도 없이는 출장이 ‘한 호텔에서의 사육’처럼 느껴진다.
그다지 덥지 않은 날씨라 루프탑 레스토랑을 찾았다. 로컬 맥주 한 잔에 곁들일 메뉴를 고르기 위해 AI를 불러냈다. 구운 문어를 먹을까, 여러 음식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오마카세를 먹을까. 가격 차이는 한국 돈으로 만 오천 원 정도였다.
AI는 오마카세를 추천했다. 처음 방문한 식당에서는 여러 메뉴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다며 돈을 좀 아끼려다 나중에 비싼 것을 먹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럴듯했다. 모로코에서 내놓는 오마카세에는 무엇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
|
|
잠시 후 눈앞에 놓인 것은 초밥 몇 줄과 캘리포니아 롤이었다. 밥은 설익었고 생선도 미국 마트에서 파는 초밥보다 못했다.
문어를 주문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루프탑은 음식보다 야경이지.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경치값을 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득 김영하 작가가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행을 가면 낯선 메뉴를 고른다는 그는 맛있으면 성공해서 좋고, 실패하면 나중에 쓸 이야기가 생겨서 좋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 기준으로 보면 이번 선택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AI의 추천을 따랐다가 문어 대신 설익은 초밥을 먹으며 허탈했던 이야기가 남았으니까. 그래도 구운 문어, 혹은 해산물 요리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세미나가 끝나고 참가자들도 하나둘 귀국길에 올랐다.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할 시간이 필요했다. AI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라바트에서의 마지막 밤이야. 문어나 맛있는 해산물을 먹고 싶어. 식당을 추천해줘.”
AI는 시내에 있는 한 레스토랑을 추천했다. 혼자 방문하기에도 괜찮고 분위기도 좋다고 했다. 지난번 추천한 메뉴는 별로였지만, 다시 검색하고 비교할 기운도 없었기에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
|
|
해가 질 시간을 계산해 택시를 불렀다.
AI가 예약까지 권하기에 붐비는 식당인 줄 알았는데, 도착해 보니 거의 비어 있었다. 금요일인데 왜 이렇지.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메뉴를 펼쳤다. 아무리 살펴도 AI가 추천했던 ‘오늘의 생선요리’는 보이지 않았다. 구운 문어도 없었다. 해산물 메뉴라고 할 만한 것은 새우와 정어리 완자 정도? 정어리 완자라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메뉴판 사진을 찍어 AI에게 물었다.
“생선요리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메뉴에 적혀 있지 않은 오늘의 생선이 있을 수 있으니 직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직원은 해산물 요리는 새우와 정어리 완자가 전부라고 했다. 실패로 끝났던 AI의 추천을 믿고 또 여기까지 온 내가 잘못일까.
지난번 식당에서는 적어도 메뉴에 문어가 있었다. 이번에는 문어를 먹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했는데 생선요리도 없는 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예약까지 권하면서. 결국 구운 가지요리와 새우, 로컬 맥주인 카사블랑카를 주문했다.
문어를 먹으러 나와 가지를 먹게 된 셈이다. 그런데 가지요리는 의외로 괜찮았다. 부드럽게 익힌 가지에 토마토와 올리브오일이 어우러져 있었고, 빵을 곁들여 먹기에 좋았다. 맥주와도 잘 맞았다. 새우는 평범했지만 가지요리 덕분에 그날의 식사를 실패라고만 하기는 어려웠다. |
|
|
그래도 약이 올라 AI에게 따졌다. 이게 뭐냐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완전히 실패한 저녁은 아니네.”
뻔뻔한 녀석. |
|
|
조금 더 뭐라고 하다가 그만뒀다. 출장 마지막 저녁을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AI와 다툰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쳤는데도 밖은 아직 밝았다. 강변을 조금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산책경로를 찾아보기로 했다. AI는 식당에서 나오면 바로 마리나 산책로로 갈 수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하지만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걸어서 30분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몇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식당 위치를 잘못 파악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가지요리가 맛있었다는 사실은 계속 강조했다. 그날 저녁을 완전한 실패로 만들지 않았던게 가지요리였던 것은 맞지만, 가지를 고른 것은 나였다.
AI와 다시 다투는 동안 해가 졌다. 혼자 모르는 길을 걸어 강변까지 갈 용기도 체력도 바닥났다. 다시 우버를 불러 호텔로 돌아갔다. |
|
|
객실로 올라가기 전, 1층에 있는 스페인 식당 앞에 멈춰 섰다. 로비와 가까워 매일 지나쳤지만 메뉴를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저녁이 조금 아쉬웠던 탓인지 어떤 음식을 파는지 궁금했다. 여기서 맛있게 먹었다는 동료의 말도 떠올랐다.
메뉴를 살펴보는데 문어를 뜻하는 ‘뽈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문어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식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맛있어 보였던 통가자미와 농어, 도미, 오징어까지. 내가 찾던 해산물이 내가 묵었던 호텔 1층에 있었다니.
문어를 먹겠다며 택시를 타고 호텔을 나섰다가 가지와 새우를 먹고 돌아왔는데, 억울해졌다.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메뉴판 사진을 AI에게 보여줬다.
“내가 해산물을 찾는 사람을 가지요리 집으로 보냈네.”
그날 AI가 한 말 가운데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다. |
|
|
문어와 통가자미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어를 먹지 않으면 다음 날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훈제 파프리카와 로즈마리, 타임을 곁들인 구운 문어요리를 주문했다. 앞선 식당에서 맥주를 마셨으니 이번에는 칵테일을 주문해보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상대인 AI에게 어떤 칵테일을 먹을까 다시 물었다.
AI는 문어요리에 들어간 로즈마리에 맞춰 화이트와인과 로즈마리가 들어간 칵테일을 추천했다. 음식과 술에 같은 허브를 쓰면 잘 어울린다는 말은 요리 예능에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설명은 그럴듯했다.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긴 접시에 두툼한 문어 다리가 나왔다. 겉면에는 불에 구운 흔적이 뚜렷했고, 아래에는 감자와 채소가 깔려 있었다.
한 점을 잘라 먹었다. 불향이 배어 있었고 속은 부드러웠다. 칵테일의 산뜻한 맛도 잘 어울렸다. |
|
|
맛있으면 성공해서 좋고, 실패하면 이야기가 남아서 좋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이번 출장에서는 둘 다 얻은 셈이다. 기대에 못 미친 오마카세를 먹었고, 뜻밖에 맛있는 가지요리를 만났다. 마지막에는 아쉬워했던 문어 요리를 주문했고, 성공적인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처음 찾았던 루프탑 식당에서 문어를 주문했다면, 호텔 1층 식당의 메뉴를 미리 봤다면 어땠을까. 좀 더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문어를 찾아다니다 가지를 먹은 이야기는 없었겠지. 그렇다고 맛있는 가지요리를 만난 덕분에 엉뚱한 식당 추천까지 고마워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AI에게 약이 올라 있었다.
라바트의 마지막 밤, 돌고 돌아 만난 문어를 씹으며 생각했다. 가끔 파랑새는 호텔 1층에 있다. 그걸 알기 위해 택시를 두 번이나 탈 필요는 없었겠지만.
다음 출장에서도 나는 AI에게 식당과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할 것 같다. 투닥투닥거리며. |
|
|
[사이에 서서]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를 썼습니다.
양 극단으로 보이는 개념들은 어쩌면 서로 맞닿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
|
10월 5일 발행했던 <세상의 모든 문화> 스티비에서는 조금 늦게 발송되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