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 '왜, 다쳤어?'
진료실 안에서 들리는 사소한 한마디에도, 나는 가슴이 움츠러든다. 또는 우당당탕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머리가 곤두서기도 한다. 혹시나 다쳤을까봐 하는 걱정이다. 말이랑 오랜 시간 같이 있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말 옆에 갈 때 항상 긴장을 놓지 못하는 겁쟁이다.
내가 신입 수의사로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살면서 말을 가까이 접해보지 않았던 나에게, 말이라는 동물은 너무 키가 크고 몸이 커서, 그 자체만으로도 접근하는 게 무서웠다. 그런 신참인 나에게, 주위에서 안전교육을 얼마나 많이 시켰겠는가. 누구는 뒷발에 차여서 복부내장이 파열이 되었다고 하고, 누구는 말 발굽에 밟혀서 발가락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다고 했다. 영화 속 어딘가에서 뒷발을 허공에 있는 힘껏 날리는 영상이 떠오르며, 진짜 제대로 맞으면 정말 뼈도 못추리겠다는 생각이 증폭되었다. 그러니 안전교육의 이론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까이 안가는 것만이 안전 같은데, 명색이 수의사인데 모양빠지게 갑옷을 입을 수도 없고, 마냥 내뺄 수도 없지 않는가.
나는 살기 위해 검색을 해 보았다. '말에게 다가가기'를 검색해서 나오는 이론적 답변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말 뒷발질을 조심하기 위해 뒤로 절대 가지 말라는 것이다. 말은 뒤쪽이 안보이니깐 말이 안보이는 곳에 위험하게 있지 말라고 했다. 또한 말의 귀 모양을 보고 화가 났는지 아닌지 파악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녕 그게 다일까? 나는 일단 잘 모르니 그대로 행했다. 가끔 말의 뒤로 걸어가야만 할 때면, 갑자기 킥이 날라올까봐 등골이 오싹했다. 말의 귀 모양을 보라고 하는데, 사실 주사를 찌르고 뭔가를 해야 하는 수의사를 좋아하는 말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대부분의 말은 내 처치가 느릴 수록 화가 점점 났고, 어떤 말은 귀나 눈을 내가 살펴보기도 전에, 그 몸부림에서 바로 드러났다.
어느 순간 나는 그 몸부림으로 인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따져볼 것은 첫째로, 말이 화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둘째로, 말이 긴장하거나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평온한지, 긴장했는지, 놀랄 무언가가 있는지에 따라 그 대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를테면, 내가 말의 엉덩이 뒤를 걸어가며, 뒷발을 갑자기 날릴까봐 심장이 쿵쾅대는 데에 반해, 말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닌데? 나 지금 뒷발질할 생각 없는데 왜 저래?' 평온한 말은 아무 죄가 없다. 말은 사람을 이기려고 사람을 향해 선제공격을 날리는 그런 종류의 동물은 아니기에 과한 상상은 나만 괴롭힐 뿐이다.
따라서, 일단은 첫번째 원칙으로, 말이 화나지 않게 하는 것, 그러니깐 말이 무서운 마음을 가지게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 두려움도 챙기기 힘든데, 말의 마음까지 챙기라니 너무 어렵게 가는 길처럼 느껴질 수는 있다. 사실, 나는 그 간극을 줄이는 비법을 책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말관리자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일단 주사 등의 아픈 행위부터 내립다 해야하는 수의사와 달리, 말의 관리자는 말에게 밥과 물을 주고 말똥을 치워주는 일, 말에게 말을 걸거나 (이거 몹시 중요함) 털을 빗겨주는 일, 몸을 쓰다듬어주는 일을 한다. 그러면, 처음엔 겁많은 야수 같았던 말이, 점차적으로 온순한 야수(차마 양이라고는 못하겠다)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고 경탄했다.
동화 햇님과 바람처럼, 그저 채찍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당근으로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비법이라는 것,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그게 더 빠른 길이었는 걸 나는 말일을 한지 아주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왜 외국 말동네에 가면 남녀노소 겁도 없이 말을 잘 다루는가 신기했는데, 외국말이 순한게 아니고 그만큼 많이 친해지기 위한 문화적 환경이 달랐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말에게 무언가를 하기 전에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시간을 가지고 자세히 행동을 관찰하며 아기 다루듯 아주 부드럽게 다가가보는 게, 결국 내 안전을 확보하는 중요한 습관이자 핵심키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살짝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다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런 너는 안다쳤냐? 아니다. 사실, 나도 많이도 다쳤다. 여전히 시큰거리는 곳도 있다. 외국말동네에서도 사람은 종종 다친다. 막상 사고가 나면 다들 그렇게 말한다. '조심좀 하지.' 그럴 때 분노게이지가 오른다. 누구는 조심 안해서 다친 것일까? 아니다. 어느 순간 순식간에 다쳐 있는 나를 발견할 정도로 상황은 빠르게 일어난다. 앞서 말한 원론적 베이직을 행해도, 사실 말은 너무 아파서, 너무 싫어서, 요동을 칠 수 있다. 세상 순했던 아기도 아플 때는 하루종일 엄마한테 투정부리는데, 동물도 당연하다. 그럴 때는 장사 없기에 진정/진통 효과의 약물 처치를 시도한다. 하지만 약이 완벽한 커버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사용을 못할 때도 있다.
이 때 두번째 원칙, 말의 반응패턴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법을 함께 활용해야 한다. 이 때 말의 종류에 따라 녀석들이 몸부림치는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를 정확히 알고 대응하는 게 나름의 요령이라면 요령이다.
사실 살면서 말을 가까이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여행지에서 승마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고, 말에게 먹이를 줘보는 체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들판의 어미말과 망아지를 만났을 때 곁에 가서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을 수도 있다. 혹시 아는가, 갑자기 내가 노후에 말 주인이나 치료자가 되어서, 말에게 바짝 접근해야 할 지도. 인생 모르는 일이라는 약간의 상상 마법을 당신에게 걸고, 아래의 말의 종류별 맞춤형 위험 대처법을 한번 요약해 보았다.
1. 망아지의 경우 (6개월령 이전) : 망아지는 다 큰 말처럼 목줄로 이끄는 것에 순응하지 않는다. 말관리자는 팔과 리드끈 등을 활용해서 망아지의 몸통과 엉덩이를 에워싸듯이 감싸서 이동시키고, 목에 주사를 줘야 할 때도 관리자가 팔로 머리와 몸을 감싸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준다. 만약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모르는 관리자가 있다면, 그것 먼저 제대로 교정해야만 서로가 다치지 않는다. 그러려면 내가 망아지를 잡는 법을 제대로 알아여 잘 알려줄 수 있다. 또한, 아파서 온 망아지는 대부분 힘이 없어서 다루기 쉽지만, 회복하면 어떻게 변신할 지 모른다. 하루 하루가 정말 다르기 때문에, 처치자와 관리자간의 충분한 기록과 대처 디테일이 충분히 공유되어야 한다.
2. 제주마의 경우 : 제주말들은 머리가 상당히 좋다. 네가 뭘 할지 나는 이미 알고 있고, 나는 그게 싫다는 표시를 미리 한다. 주사를 놓기 전부터 머리를 흔들거나, 주저앉을 준비, 몸으로 밀어낼 준비를 하는 등 미리 사인을 준다. 목에 주사를 주려고 할 때 머리를 갑자기 들이대면서 안경이나 코 쪽으로 공격이 들어오거나, 몸통으로 미는 형태의 요동이 빈번하기에, 키가 작다고 만만하게 보지 말고, 언제든 피할 내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3. 경주마의 경우 : 현역 경주마는 (2~7세의 더러브렛 품종) 덩치 큰 예민보스 겁쟁이다. 본인이 놀라면 몸을 어찌할 줄을 몰라서 요동을 치게 된다. 때로는 그 놀라는 상황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와당탕 일어나서, 사람이 미처 대응을 못해 다치기도 한다. 수의사가 진정/진통제를 사용하여 안전을 기하더라고, 갑자기 통증이나 주위 환경 등으로 놀랄 경우 순간적 요동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에 나온대로, 말의 귀의 움직임, 눈빛, 자세 등을 더 유의깊게 살펴야 한다. 처치를 할 때는 보통 틀에 넣고, 주로 말의 앞과 옆쪽에서 행하니 말에게 가격을 안당할 것 같지만, 그 상황에서도 앞무릎이나, 머리, 목의 움직임 등으로 인해 다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4. 씨암말의 경우 : 나이가 있다보니 통증과 변화에 비교적 둔감한 편이다. 하지만, 망아지와 분리가 될 경우에는 바로 긴장 게이지가 치솟으며 변신한다. 따라서, 망아지 치료를 할 때에는, 항상 씨암말의 행동에 신경을 쓰며 보정도 같이 해야 한다. 또한, 씨암말이 아파서 치료할 때에도, 망아지가 항상 시야에 있게 확보해 해줘서 씨암말이 긴장하지 않게 해야 한다. 결국 어미말과 망아지를 둘다 살펴주는 게 우리의 안전 확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말과 사람.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 함께 해 왔다. 그만큼 매력이 있으니, 지금껏 우리는 서로 이별하지 않고 제법 잘 살아오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조금 더 다가가려면, 서로 불필요한 두려움을 줄이는 법을 알면 한결 더 긴장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을 써 보았다. 여전히 나는 말에게 다가갈 때 긴장을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다. 두려움이란 건, 어쩌면 상대의 반응을 모르니 자꾸만 더 커지는 내가 설정하는 크기 만큼의 감정 같다. 설령 상대가 말이라는 동물이 아니더라도, 다른 종류의 동물, 혹은 내가 감히 접근 못하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너를 알기 위해 애쓰고, 너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 지 준비하는 나의 자세는, 비록 상대가 몰라준다 해도, 스스로가 그 두려움을 넘어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용기 정도는 줄 수는 있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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